이중섭 유토피아의 시원(始原)
이중섭 유토피아의 시원(始原)
「망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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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월」 1940년 작 | ||
평양상공회의소 초대 회두(會頭) 이진태는 한말에 상투를 꽂은 채 일본으로 건너가 무역을 했던 사람이다. 서북 경제계를 주름잡는 실업가였고, 농공은행 두취(頭取)를 지낸 은행가였다. 평양 이문리에 있는 그의 집은 규모가 방대하고 화려했다. 그의 정력은 사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기가(妓家)에도 반영되어 그가 머리 얹어 준 기생만 해도 30명이 넘었다. 본처와의 사이에 무남이녀를 두었는데 두 딸 모두 총명했고 미모 또한 출중했다. 작은 딸이 성장하여 1903년경 평원군의 한 지주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남편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1916년에 막내로 태어난 작은 아들이 바로 이중섭이었다. 이중섭이 한 살이었을 때, 열세 살 형이 열다섯 살 여자와 결혼했다. 이중섭은 열네 살 위의 형수와 여섯 살 위의 누나 등에 업혀서 자랐다.
이 한반도 북부지방은 산이 많고 평야가 드물다. 그러나 평원군은 관서평야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논과 저수지가 많은 곳이었다. 이중섭이 1940년 10월 자유미술가협회 조선展에 출품했던 ?망월?에 저수지 제방이 그려진 것을 보면, 그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이 평원군을 생각하면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망월」의 원작(原作)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에 찍었던 흑백사진은 남아있다(위 첫 번째 그림). 캔버스에 그린 유화인데, 붓 터치의 굵기로 보아서 30호 이하의 크기로 보인다. 이 「망월」에 대해 최석태 著 「이중섭 평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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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월」 1941년 작 | ||
“단애(斷崖)가 있는 물가에 쭈그리고 앉은 염소와 그에 기대어 누운 벌거벗은 여자, 그리고 두 마리 새를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제는 무엇인가? 아쉽게도 나는 이 그림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해설해놓은 책을 아직까지 한 권도 본 적이 없다. 벌거벗은 여자가 염소에 기대어 누웠다고 했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이상한 여자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다. 사실 이중섭이 이런 이상한 그림을 자꾸 그리니까 나중에는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하게 된다. ‘이중섭의 정신이상’에 대해서는 「파란 게와 어린이」 場에 가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만일 이중섭이 염소 대신에 벌거벗은 남자를 그려 넣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큰일 났을 것이다. 외설이다, 풍기문란이다 하며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벌거벗은 여자는 애인 마사꼬를 그린 것이고, 염소처럼 생긴 동물은 이중섭 자신을 상징적으로 그린 것이다. 예술은 사회가 험해질수록 더욱 더 상징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자는 염소처럼 생긴 동물의 앞다리와 목 사이를 베고 누워있다. 왜 이렇게 벌거벗은 마사꼬가 이중섭의 가슴을 베고 물가에 누워있는 것일까? 이 그림의 명제는 달을 쳐다본다는 뜻의 ‘망월(望月)’로 되어있고, 그림에서는 새 한 마리가 달을 쳐다보면서 소리를 내고 있다. 발정 난 새가 달밤에 짝을 부르는 것이다. 이 한 쌍의 새는 이중섭과 마사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달은 이 그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원작에서는 보름달이 전부 다 보이게 그렸을 것이다. 사진이니까 트리밍 하는 과정에서 잘려나갔을 것이다. 어떻든 이 그림은 이중섭과 마사꼬의 성애(性愛)를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이 그림의 해설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물 건너에는 단애(斷崖)가 보인다. 단애란 언덕이 잘렸을 때 나타나는 깎아지른 낭떠러지 절벽을 말한다. 이중섭은 왜 이런 단애를 그렸을까? 눈에 보이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그린 것이 아니다. 이중섭 그림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그린 것은 하나도 없다. 다 필요해서 그린 것이다. 절벽 밑을 보라. 강물이 흘러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강 이쪽에는 제방이 조금 뻗어나가 있다. 수위가 낮고 물이 거침없이 하류로 흘러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 제방이 터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쪽 제방이 가 닿았던 건너편 강 언덕이 물살에 휩쓸려 단애(斷崖)를 드러낸 것이다. 이 그림은 그동안 억제되었던 이중섭과 마사꼬의 성애가 봇물 터지듯 터진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9세 미만 관람불가의 그림을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연못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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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못이 있는 풍경」 1941년 작 | ||
이중섭이 1941년 일본유학시절에 그린 「연못이 있는 풍경」(위 두 번째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제방은 없지만 멀리 보이는 두어 채의 농가와 주변 지형과의 비례를 따져보면 제법 큰 연못 혹은 저수지를 그린 것으로서 고향 평원군을 생각하면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1940년에 그린 「망월」과 함께 이중섭 유토피아의 시원(始原)에 해당되는 그림이다. (※ 이 그림에 대한 해설은 다음 회에 하기로 한다.)
「망월」(1941)과 「토끼풀이 있는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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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끼풀 꽃이 있는 바닷가」 1941. 5. 25 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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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산 풍경」백남순(오산고보 미술교사. 임용련 부인) 작품 | ||
이중섭의 아버지는 이희주였고, 조부는 이창희였으며, 증조부는 이동규였다. 고조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고조부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네 양자로 들어가서 낳은 외아들이 증조부 이동규였다. 이동규는 성격이 강직하고 활달한데다 아버지가 양자인 덕에 두 집 재산을 물려받아 크게 일어설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약간의 자작농토에다 소작지까지 많이 부치면서 억척스럽게 일한 결과 평원군에 100칸이나 되는 커다란 집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이 이중섭 친가의 부는 평양 외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평양 갑부 이진태가 딸을 평원군 이희주에게 시집보낸 걸 보면 당시 이중섭 친가는, 재산이 아닌, 다른 어떤 레벨이 상당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중섭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여덟 살이 되던 해 평양 외가로 보내어져 거기서 평양 종로보통학교를 다녔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고보에 입학.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다.
오산고보 재학 중, 형 이중석이 일본 척식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평원군의 가산을 정리한 뒤 어머니를 모시고 신흥도시 원산으로 이사를 갔다. 형은 어머니에게 남겨진 집안 유산에다 외할아버지 유산까지 합해진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원산에서 백화점을 경영하여 큰 부를 이루었다. 여러 사업의 주식을 소유했고, 수십만 평에 달하는 과수원을 소유했다. 과수원만으로도 함경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였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 송도원해수욕장에 별장을 마련했다. 노송이 빽빽이 들어선 이 송도원은 조선 최고의 해수욕장으로서 일본사람들의 해수욕장이었다. 서양 사람들의 별장도 많이 있었다. 이중섭은 방학 때마다 여기에 내려와 해수욕과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1941년 일본유학시절에 그린 「망월」(위 세 번째 그림)은 오산고보시절의 오산풍경을 생각해서 그린 것이다. 「토끼풀 꽃이 있는 바닷가」(위 네 번째 그림)도 1941년 일본유학시절에 그린 것인데 원산 바닷가 송도원 해수욕장 풍경을 생각해서 그린 것이다. 「연못이 있는 풍경」과 이 그림들에 대한 해설은 다음 회에 계속하기로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