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고보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을 맺었다. 협약의 내용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는 것이 극동평화에 공헌하는 것임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이 통치하려고 하는 필리핀에 대해 침략적 의도를 갖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해 11월 이등박문을 조선에 보내어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고종은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려고 1907년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으나 실패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는 무장 독립운동 결사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907년 상동학원을 거점으로 하여 조직된 신민회가 그 최초의 단체였다. (※ 상동학원 학감 이회영(李會榮, 友堂)은 1911년 3월 북경에서 원세개 총통과 회담하여 만주 통하현 합니하에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고, 1912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총 3,500명의 독립군을 양성 배출함으로써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또 민족정신을 계몽하기 위한 학교도 설립되었다. 도산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원을 세웠고, 남강 이승훈은 1907년 12월 평북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이광수가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온 것은 1910년이었고, 조만식이 교장으로 취임한 것은 1915년이었다. 1919년 오산학교는 3.1 운동 당시 일본헌병들에 의해 소각되었다. 이승훈은 다시 교사를 짓고 1920년 9월에 개교했다. 오산학교가 오산고등보통학교로 된 것은 1926년이었고, 이중섭이 이 오산고보에 입학한 것은 1929년이었다.

   
 
  ▲ 오산고보 화재 전 모습  
 

임용련과 백남순

오산고보생 이중섭을 화가의 길로 이끌어준 사람은 오산고보 도화교사 임용련이었다. 임용련은 1901년 진남포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9년 배재학교 3학년 때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쫓기게 되자 중국으로 도망. 거기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고등학교와 아트 인스티튜트를 다녔다. 1924년 예일대학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했고, 수석 졸업생에게 주는 세계 일주 여행권을 받아 유럽을 여행하던 중 프랑스에서 백남순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백남순은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양화과를 다니다가 1년 만에 귀국. 프랑스계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통학교 교사로 일했다. 1928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아카데미를 다녔고, 그 무렵 임용련을 만난 것이었다.

이들은 1930년 봄 프랑스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 두 사람 모두 프랑스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심층에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프랑스 화단의 화려함보다는 어두운 조국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귀국을 결의했고, 똑같이 고국에 금의환향했다. 7월 고국으로 돌아와 11월 동아일보사 전시장에서 부부전을 열었다. 이 예술가 부부가 오산고보 교장 김여제로부터 도화 겸 영어교사직을 제의받고 오산으로 부임해온 것은 1931년 봄이었다. (※ 1931년 당시 이중섭은 오산고보 2학년생이었는데, 그것은 1930년에 오른팔이 부러져 1년간 휴학했기 때문이었다.)

   
 
  ▲ 임용련 백남순 약혼 사진  
 





오산의 정신



   
 
  ▲ 오산 지도  
 

   
 
  ▲ 오산 풍경 (백남순 작)  
 

서양에 가서 서양미술을 직접 체험하고 온 임용련 백남순 부부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인물이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조선의 변방 오산고보로 부임해온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위 오산지도를 보자. 경의선을 타고 청천강을 건너면 고읍역이 나온다. 고읍역에서 내려 정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서쪽에 오산고보가 있다. 오산고보 동쪽에는 오봉산이 있고 서쪽에는 제석산이 있다. 교문 앞에는 교직원들의 사택과 학생들의 하숙집이 있고, 학교 안에는 운동장과 교사와 실습농원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오산의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오산의 정신은 함석헌의 국사 강의로도 유명하다. 수신(修身)시간에 일본 순사 몰래 했던 그 국사 강의는 소름끼칠 만큼 열렬했다고 한다. 그 강의내용이 문제가 되어 함석헌은 정주 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흰 도포자락을 날리며 오산학생들의 영혼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임용련 백남순 부부가 이 오산고보에 온 것은 학생들의 영혼에 불을 지르기 위해서였다.


방화사건

   
 
  ▲ 오산고보 화재 현장  
 


1934년 1월 31일 새벽 3시 오산고보에 화재가 발생했다. 교장실이 있는 교사 1동이 전소되었다. 이 사건은 이중섭과 그의 친구들이 모의하여 방화한 것인데, 그럼으로써 화재보험금을 타서 새 교사를 짓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금까지는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다르다. 당시 일본천황의 칙서가 오산고보에도 내려왔고 교장실 옆방에 신주단지 모시듯 해야만 했다고 한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듯 모두들 그것을 줄줄 외워야만 했고, 이 방을 지날 때마다 절을 해야 했다. 이 칙서를 없애기 위해 교사를 방화한 것이었다. 방화는 친구들이 했지만 이중섭은 자신이 혐의를 뒤집어쓰기로 하고 다음날 아침 임용련을 찾아가 방화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임용련은 “없던 일로 해라. 방학에 고향 가지 않은 것은 내가 그림공부를 하라고 해서라고 말해야 한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안심해라.”고 했다. 이중섭은 졸업이 임박했을 때 학교 서쪽의 제석산에 올라가 오산일대를 풍경화로 그려 그 그림을 임용련에게 바쳤다고 한다.

1941년 작 「망월」


   
 
  ▲ 망월 (1941년 이중섭 작)  
 

이중섭이 1941년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망월」은 흑백사진이 남아있어 당시의 원작을 가늠케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의 배경이 백남순 작 「오산 풍경」과 흡사하다. 오산을 생각하며 그린 것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한 벌거벗은 여자가 커다란 물고기를 안고 누워서 달을 쳐다보고 있다. 또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는 염소처럼 생긴 동물이 고개를 뒤로 돌려 한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물고기를 안은 여자는 마사꼬를 그린 것이고, 염소는 이중섭을 상징한 것이며, 아이는 미래에 태어날 자녀를 그린 것이다. (※ 이 아이가 자녀라는 것은 다음 회 「토끼풀 꽃이 있는 바닷가」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나는 지난 15회에서 1940년 작 「망월」의 주제는 ‘봇물 터지듯이 터진 이중섭과 마사꼬의 성애’라고 했다. 이 1941년 작 「망월」의 주제는 ‘마사꼬와 가정을 이루고 사는 오산 풍경’이다. 1940년 작 「망월」과 마찬가지로, 마사꼬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기인하는 이중섭의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서도 이중섭의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갈수 없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필코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절실한 염원을 의미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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