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필코 도달하려는 염원


「망월」 1941년 작


   
 
  ▲ 「망월」 1940년 작  
 

 

   
 
  ▲ 「망월」1941년 작  
 

   
 
  ▲ 「망월」 1943년 작  
 


「망월」은 이중섭이 1940년과 41년 그리고 43년에 그려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세 작품 모두 벌거벗은 여자의 누워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는데, 송혜수 화백의 증언에 의하면, 1943년 작 「망월」은 출품전날 밤 돌연 마음이 바뀌어 여자를 지우고 그 자리에 남자를 그려 넣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1941년 작 「망월」에는 여자가 커다란 물고기를 안고 누워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무렵 이중섭이 마사꼬에게 그려 보낸 엽서그림(1941년 6월 12일자 엽서그림과 16일자 엽서그림)에도 벌거벗은 여자가 커다란 물고기를 안거나 옆구리에 끼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다른 엽서그림(위 세 번째 그림)에도 여자가 커다란 물고기를 머리 위로 쳐든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무엇을 상징한 것일까?

나는 지난 3회에서, 「물고기가 그려진 소」에서의 물고기는 일본인 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 조선인 예술가들을 상징한 것이라고 했다. 또 지난 15회에서, 「연못이 보이는 풍경」에서의 물고기는 이중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미태를 보이는 마사꼬를 상징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1941년 작 「망월」에서의 물고기는 그런 특정한 인물을 상징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인 여자(마사꼬)에게 어떤 개념을 부여하기 위해 쓰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머리 위에 새가 앉아있는 남자’를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하자. 이 그림은 실제로 남자의 머리 위에 새가 앉아있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남자의 정신세계를 상징적인 사물로 바꿔 그린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오묘한 감정이 발현된 것인 만큼 수학처럼 정확한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수학보다도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중섭이 25세에 그린 이러한 작품들은 확실히 경지에 오른 작품들로서 예술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토끼풀꽃이 있는 바닷가」

   
 
  ▲ 1941. 6.12  
 

   
 
  ▲ 1941. 6. 16  
 

   
 
  ▲ 1941  
 



원산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이 그림은 이중섭이 1941년 5월 25일 엽서에 그려 마사꼬에게 보낸 그림이다. 이 그림에 그려진 사물들을 거리상으로 분류해본다면, 원경(遠景)에는 수평선과 흰 돛단배와 돌출된 육지가 있고, 중경(中景)에는 바다와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두 어린 아이가 있으며, 근경(近景)에는 한 쌍의 새와 조개껍데기들과 토끼풀꽃이 있다. 이 그림에 대해서, 어떤 책에는



“그림을 보는 사람은 마치 바닷가 모래밭에 실제로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모래밭에 납작 엎드려 있는 느낌’을 갖게 하는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새의 머리나 토끼풀이 수평선보다도 위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수평선은 그림을 그린 사람의 눈높이를 알려주는데, 새의 머리나 토끼풀이 이 수평선보다 위에 그려져 있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눈높이가 이 새의 머리나 토끼풀보다도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 이 책에는



“상투적으로 느껴질 풍경을 생동감 넘치게 만들고 있다.”



라고 적혀있는데, 이 그림에서 그러한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걸어가는 새의 동작이고, 둘째는 멀리서 놀고 있는 두 아이와 이를 바라보는 새의 시선이며, 셋째는 토끼풀 잎사귀와 꽃에 이르는 줄기의 선적(線的)인 흐름이다.

   
 
  ▲ 「토끼풀꽃이 있는 바닷가」1941.5.25  
 

   
 
  ▲ 1941.6.19  
 

   
 
  ▲ 1941  
 



그렇지만 이 그림은 단순히 그러한 ‘생동감’이나 ‘현장감’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은 이중섭과 마사꼬가 원산 바닷가에서 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그린 것이다.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한 쌍의 새는 이중섭과 마사꼬를 상징한다. 멀리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두 아이는 장차 태어날 이중섭의 자녀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면에 클로즈 업 된 클로버 꽃이 ‘행복’이란 개념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행복을 높이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중섭의 눈높이는 클로버보다 낮아야 했던 것이다. 모래밭에 납작 엎드려있는 것처럼 눈높이를 설정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 그림은 마사꼬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기인하는 이중섭의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서도 이중섭의 유토피아는 갈 수 없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필코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절실한 염원을 의미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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