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없는 섬, 꿈꾸던 유토피아”

   
 
   
 
제주도에서 가장 한적하고 걷기 좋은 바닷길을 꼽으라면,나는 단연 비양도를 손꼽고 싶다.서울의 관광객들에게 비양도는 제대로 소개가 되어있지않다. 그러나 비양도야말로 섬에서 걷는'바당올레'의 최고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선 협재에서 비양도까지 이어지는 흰 모래밭이 연출하는 초록빛 바닷물이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손을 담그면, 어찌될까. '시인의 마음'이라면, 두손도 초록으로 물들 게 분명하다. 그래서 '초록빛 바닷물'은 최장기 인기동요로 지금껏 불려지곤한다. 그러나 '현실의 바다'에서 순진무구한 초록빛을 보기란 그리 쉽지않다. 비양도 바다의 오묘한 빛깔은 무어라 비할 것인가!   

색깔이 가장 아름다운 우리바다를 꼽으라 한다면, 이 역시 쉬운 판단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움의 기준 자체가 애매한지라 결론이 쉽지않다. 같은 장소의 바다도 앞에 든 이유 때문에라도 늘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꼭 집어내서'말하라면, 왠일인지 이 역시 비양도 주변이란 생각이 든다.

협재에서 건너편에 보이는 비양도까지 5미터 내외의 얕은 바다가 이어짐을 기억하리라. 까만 용암이 많은 여느 제주바다와 달리 고운 모래밭의 천해(淺海)다. 빛의 파장이 흰모래빛과 어우러져 오묘한 빛깔을 탄생시켰다. 흡사 신이 현현(顯現)하는 듯 에머랄드빛 융탄자를 깔아둔 듯싶다.

천혜의 바다빛깔이니, 경관가치만으로도 엄청난 부를 창출하는 바다이리라. 관해(觀海)의 미학에서 그동안 자주 바다빛깔의 경관이 무시되어 왔다. 외국에서는 바다빛 고운 해변에 친수공간, 이른바 워터프론트(Water front)를 조성하여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큰돈을 벌어들이곤 한다. 협재에서 비양도에 이르는 물목은 엄청난 경관적 재부를 지닌 곳이 아닐수 없다.  

비양도를 가자면 아침 9시 정각에 한림항에서 출발하는 도항선을 타야만한다. 불과 20여분이면 닿는다. 거리는 짧아도 섬은 섬인지라 교통 편한 제주도같지가 않다. 피서철에는 자주 배편이 다닌다지만 늦가을 아침 배편에는 필자를 포함하여 고작 다섯명이 탔을 뿐이다. 겨울철에는 손님 한두명 태우고도 운항하니 당국의 지원이 없으면 운항 자체가 불가할 것이다.

가오리 형상의 비양도(飛揚島)는 글자 그대로 '날라온 섬'. 비양도 소개책자는 저마다 '천년의 섬 비양도'라고 한다. '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았다. 산이 네 구멍이 터지고 붉은물이 5일 동안 내뿜고는 그쳤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려 목종 5년(1002) 기사 때문이리라. 그러나 산견되는 신석기유적으로 미루어 천년전 화산폭발로 생겼다고는 할수 없을 것이다. 다만 본디 있던 섬에 다시금 재폭발이 이루어져 오늘과 같은 화산섬이 조성되었음직하다.

섬을 한바퀴 돌아본다. 대형화산탄이 즐비한 해변에는 큰자재여,구븐들, 밧서비녀, 안서비녀 등의 여, 애기업개돌 같은 용암굴뚝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화산 등성이에는 밭은 없고 갈대밭만 우거져있어 식량마련이 만만치 않았을 섬으로 보인다.

   
 
  ▲ 펄랑못  
 

   
 
  ▲ 펄랑못당  
 

비양도의 경관에서 빼놓을수 없는 곳은 염습지인 펄낭이다. 바닥으로 바닷물이 스며들어 형성된 펄낭은 조수운동과 반대로 밀물에는 수위가 줄고 썰물에는 높아진다. 펄낭의 끝에는 마을 본향당이 있어 비양도사람들이 펄낭을 얼마나 신성스럽게 여기는가를 말해준다. 염습지의 소금기 올라올만한 용암에 신목인 사철나무가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사철나무의 녹색과 검정 용암의 강렬한 대조는 모진 풍토에서 살아나가는 생명의 힘 그 자체이다. 오죽하면 마을민이 공동체의 신목으로 설정하고 모셔왔을까. 얼마 전까지만해도 인근 배들이 비양도를 지나칠라면 반드시 찾아들어와 인사드리는 순례코스였다.

본 마을이 형성된 앞개포구까지 걸어왔는데도 한시간이 안 걸렸으니 작은섬이다. 비양봉을 올라가본다. 불과 30여분이면 오르는데 눈 앞에 한림항은 물론이고 자잘한 오름들, 그리고 한라산 정봉이 다가온다. 한라산이야 제주도 어데서고 보이지만 이처럼 제주도에 딸린 섬에서 바라보는 멋은 한결 색다르다.  

비양봉 정상에는 무인등대가 있어 밤새워 신호를 내보낸다. 푹 꺼진 분화구 너머 초록빛바다가 한눈에 잡힌다. 펄낭의 좁고 긴 물매, 앞개포구의 고즈녁한 풍경, 한림항의 조금은 번잡스러운 풍경이 모두 들어온다. 잠들은 쌍둥이 분화구가 다시금 폭발할것만 같은 백일몽에 빠져든다. 등대 옆 풀밭에서 팔베개하고 누우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수 없다. 섬의 시간이란 이렇듯 무한대다. 시간은 충분하다. 오후 3시30분이 되어야 배가 나가므로 작은섬에서 남은 것은 시간뿐이다. 번잡스런 음식점이 많다면 대개 질펀한 술판이나 과잉섭취로 시간을 때우는게 십상인데 피서철 이외에는 음식점도 없어 끼니를 거를 판이다. 우리들의 여행이란 늘 그렇듯 과보호, 과식, 가속도 등으로 점철되어 이렇듯 한가한 시간을 갖기가 어렵다. '섬의 시간', '느림의 시간'을 배울라치면 어느 섬이고 해산(海山) 정상쯤에서 한 시간여 누웠다 내려오길 권해본다.

비양도는 물 없는 섬이다. 오로지 빗물에만 의존해서 살았다. 빗물 조차도 금새 밑으로 빠지는 화산토인지라 본섬에서 질흙을 가져다가 다져서 물을 모아야했다. 닭똥같은 오물질이 수시로 물에 들어가서 온갖 풍토병도 일으켰다. 물없는 섬의 삶이란 참으로 절박한 삶이다. 조금 전까지의 초록빛예찬과는 판이한 현실이다. 다행히 1965년, 해역사령부에서 협재에서부터 해저파이프를 연결시켜 식수공급이 가능하게 되었다. 오죽 큰 사건이었으면 포구에 송덕비까지 세워 식수가 들어오게된 역사적 내력을 각인시켰을까.

고종13년(1876)에 서(徐)씨네가 처음 입도했다고 전해온다. 재미있는 점은 펄낭의 본향당 주신이 건너편 금릉에서 갈라진 당(堂)이란 전설이다. 금릉당은 임씨하르방이고 비양도당은 김씨할망이란다. 금릉당과 비양도당이 도채비불이 되어 예의 그 '초록빛 바닷물'쯤에서 부딪쳐서 빛을 발하곤 한단다. 하르방과 할망이 데이트하는 셈이다. 이 전설은 금릉에서 최초로  누군가가 비양도로 입도한 역사를 말해줌이 아닐까. 당의 갈래퍼짐을 통하여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역사를 알수 있으니, 섬민중의 역사란 어느 곳이나 이와같을 것이다. 그러한 즉, 어느 섬에 가서나 '섬 무지랭이'들에게 기록 없음을 탓하지 말 것이며, 기록만으로 섬의 역사를 함부로 재단할 일도 못된다.

포구에서 주민들이 말린 감태를 묶고 있다. 일제시대는 폭약재료로 쓰였으며, 지금은 의약품에 쓰이는 감태는 사실 '물고기의 숲그늘'이다. 비양도 주변에 감태밭이 무성함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물고기집이 많다는 증거이리라. 작년에 60㎏에 6만원을 받았는데 금년에는 3만8000원에 불과하다며 볼멘소리가 높다. 바다의 삶이란 늘 그런 것이다. 풍년 들면 가격이 내려가서 속상하고, 흉년 들면 고기는 없는 대신에 값이 올라 그런대로 버틸만하다. 횟집에서 가격표 대신에 '싯가(時價)'로 쓰여있음은 이와같은 현실에서 비롯된 것.

여름 한철 한치와 갈치잡이가 주업이다. 잠녀 물질로 벌어들이는 전복, 오분자기, 소라 등도 중요하다. 물론 제대로된 전복이 잡힐 리가 없다. 어장관리가 되지않기 때문이다. 비양도를 마주보는 제주도 서북해안의 월령, 귀덕, 협재, 옹포, 한림, 금릉, 수원, 한수리, 용운동 등 아홉 어촌계가 '관행'을 내세워 이곳에서 대대적으로 채취하기 때문. 무인도 시절부터 비양도를 주어장으로 조업하던 아홉마을에서 백년 이전의 관행을 내세워 공동어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관습법이 사회적 관심을 끌고있는 바, 비양도에서도 적어도 지난 100여년의 관행이 현실법으로 통한다. 수백년 지속되어온 관행어법의 역사적 권한이 존재하는 조건에서 후발주자로 섬마을이 형성된 결과이리라.

비양도는 분명히 가난하다. 그러나 떠나오는 뱃전에서 필자를 감동시킨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비양도에 차가 한대도 없다는 점이다. 차 없는 섬! 꿈꾸던 유토피아 아닌가. 초록빛바닷물에 차까지 없는 섬이니, 비양도는 '빠름'이 아니라 '느림'의 재부를 잘 간직한 '미완의 섬'이란 생각을 어찌 저버릴수 있으랴. 
 <민속학자·제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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