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20.원산시대(2)

   
 
  「도원」종이에 유채, 1953~4년(추정)  
 

표현주의적인 그림들

마사꼬를 뒤로하고 1943년 원산에 돌아온 이중섭은 새벽마다 뒷산에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카 이영진을 깨워 데려갈 때도 있었는데, 새벽 먼동이 틀 때의 하늘색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마사꼬가 있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산을 내려오면서 넋두리처럼 “매일 저 빛깔은 다르단 말이야.”라고 했다 한다. 19세기 서양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빛을 연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네나 르느와르처럼 빛의 찰나적인 현상을 붙잡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기 인상주의자들처럼 대상을 그 고유의 색에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자신의 주관적 정서나 상상을 표현하려 했고, 20세기 표현주의자들처럼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형태를 외곡 시키고 비자연적인 색채를 사용했던 것이다. 고은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여명색(黎明色)의 그 검푸른 순수를 완전히 새벽하늘로부터 탈취해내는 것이다. 그는 그것과 싸워서 이길 듯하다가 지고, 질 듯하다가 이겨서 이윽고 그의 빛깔을 완성해야했다.

‘그의 빛깔’이라고 한 고은의 해석은 시적이면서도 매우 정확하다. 이중섭 그림은 서양미술로 말할 것 같으면 표현주의에 해당된다. 흔히 이중섭 그림을 야수파적인 그림이라고들 말하는데, 외적(外的) 현상을 중시하는 야수파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적 현상을 보다 중요한 표현 대상으로 삼았던 표현주의적인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물체와 색을 분리해 냄으로써 자연색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주관적인 색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소묘」 1941년  
 


이듬해(1944년) 가을 이중섭은 경성에서 열린 제4회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다. 그리고 이 전시가 끝나자마자 평양 체신회관에서 6인전을 열었다. 참여작가들은 김병기·문학수·윤중식·이호련·황염수였다. 당시의 이중섭 그림에 대한 황염수의 증언이 최석태 저 「이중섭 평전」에 적혀있는데, 출품작은 5~6점이었고 비교적 큰 그림들이었으며 모두 소를 그린 것이었다고 한다. 소 전신을 그린 것, 혹은 여러 마리를 그린 것들로서 모두 박력이 넘치고 용맹스러워 보였으며 사실적이면서도 매우 율동적이었다고 한다. 그가 한국전쟁 때(1950년) 남한으로 피난 와서 그린 소 그림들처럼 무섭거나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본 유학시절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던 소 그림들처럼 용감하고 활달한 분위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산시대 이중섭의 이런 밝은 분위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만일 그가 조선에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일본 군부에 징집되어 제국주의 전쟁에 끌려갔을 것이다. 그가 일본에서 원산으로 돌아온 것은 그러한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적적으로 징집되지 않았다. 전쟁은 비상사태에 들어갔지만,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후방의 식민지 사회에서는 오히려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인들은 식민지민으로서 쌀을 비롯한 모든 물자들을 전부 공출에 바치고 형편없는 식량을 배급받아 연명해 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중섭은 형 이중석의 탁월한 이재(理財) 능력 덕분에 심각한 식량난이나 물자난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이중섭의 제주도 피난시절(1951년)을 고흐의 ‘아를르 시대’에 비유하는데, 오히려 이 원산시대를 고흐의 그러한 시대에 비유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중섭의 원산시절 그림들은 황염수의 말대로 박력이 넘치고 용맹스러우며 율동적인 그림들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1945년 서울 미도파 백화점 지하실에 그린 벽화에서는 일본 유학시절에 그렸던 그림들처럼 비극적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유토피아)를 염원하는 부분도 감지된다. 당시 그가 지향한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작품」 1940년  
 


미도파 백화점 지하실에 그린 벽화

1945년 4월 마사꼬가 현해탄을 건너 이중섭을 찾아왔다. 이중섭은 그녀와 5월에 결혼한다. 8월에 해방이 되고, 10월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해방기념미술전람회가 열린다. 이중섭은 이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작품을 가지고 38선을 넘어왔지만 출품기한을 넘기는 바람에 전시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서울에 와서 조선신미술가협회 회원인 최재덕과 함께 미도파 백화점 지하실에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이 벽화는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 크기였는데 거기에 150호 가량의 천도(天桃) 나무를 그리고 동자들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형상이었다고 한다. 유화 페인트가 없어서 간판을 그릴 때 쓰는 페인트로 그렸다고 하는데 절반은 최재덕이 그렸고 절반은 이중섭이 그렸다고도 한다. 이 그림에 대해 고은은 “매우 도교(道敎)적인 신선 사상을 표백했다.”고 했고 최석태는 “해방의 기쁨을 소리높이 노래하는 것이리라 확신된다. 아이들이 복사꽃이 핀 곳에서 노는 광경은 바로 해방된 조국을 낙원으로 만들어보자는 의지의 표출이었다.”고 했다.

   
 
  「도원」 은지화 1953~4년(추정)  
 

   
 
  「망월」 1940년  
 


당시의 미도파 백화점 지하실 벽화는 지금 남아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가 1953~4년경에 그린 「도원」이란 그림이 이 벽화와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이 「도원」과 비슷한 형상의 은지화도 발견되는데, 모두 무위지향(無爲之鄕)을 그린 것이다. 그의 새로운 유토피아가 나타난 것으로서 해방 직후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는 국내 정치의 혼란 속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 했던 이중섭의 염원이 담긴 것이라고 해석된다.

1945년 10월 당시에는 아직 38선이 확고해지지 않은 때였기에 월남이나 월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 회에는 공산사회주의 체제 하의 북한에서의 이중섭 그림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