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날이 장날이라고,모처럼 기회가 생겨 당도한 마라도(馬羅島)는 온통 바람이었다.12월 중순의 칼바람이 어찌나 센지,나무 한 그루 없는 섬에서 걸음을 떼기 힘든건 고사하고 방향감각조차 잃을 지경이었다.높은 파도로 바닷물이 하얗게 뒤집혀 더욱 질리고 추웠다.  그러나 기어코 이땅의 최남단에 선 감동이 훨씬 컸다.어렵게 이루어진 만남 치고는 날씨가 무척 스산했으나 하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풍광의 귀한 텃세려니 여겼다.제주도 시절의 고은 시인이 쓴 ‘마라도에서’의 한 구절을 그때 떠올렸다.  ‘주여,오래 오래란 얼마나 긴 것이옵니까  이섬의 바람을 재우시고  한 나무만 겨울 적양목(赤揚木)을 심게 하옵소서  그렇지 않으면,내가 유일한 적양목을 심겠나이다’ 하다가 ‘밀레니엄 법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보았다.한 찻집 문에 붙은 ‘밀레니엄 커피’도 눈에 띄었다.80명 가량 주민의 대부분이 관광객을 상대로 음식류를 파는 사람들이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하지만 마라도의 밀레니엄은 조금 뜻밖이었다.북단에서 남단까지,어디를 가나 이 말로 가득 차 있는 걸 새삼 느꼈다.  정부에서 준비한 국가 규모의 행사가 이만저만 거창하지 않다.지방자치단체별로 건립하는 기념조형물이라든가 잔치가 또 숱하다.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새해 일출을 맞으러 동해안을 찾거나 연휴를 이용해서 해외로 나가는 것이 보통이지만,이번 연말연시는 온나라를 통틀어 술렁거린다.  지난 천년의 마지막과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동시에 지켜보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행운이다.그래서 사람들은 그 순간의 감격을 놓칠세라 동으로 서로 부지런히 뛰어다닐 판이다.다가온 밀레니엄을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상의 한 점이 아닌,인류생활의 패러다임 변환을 알리는 상징적 시간으로 인식한다.  일단 맞는 말인데 문제는 그렇게 극성을 떠는 과정에서 확인하는 또 하나의 ‘냄비기질’이다.일찌감치 버린 ‘단기’를 염두에 두고 서력(西曆) 중심의 서양잔치에 덩달아 휩쓸리지 말자고 하기엔 이미 때가 늦다.그건 그것대로 우스운 노릇이다.다만 이렇게까지 떠든 다음엔 무엇이 남는다? 하는 의문이 앞선다.모르면 몰라도 연초가 되면 지금껏 쏟아 부은 돈이 아깝다는 심정으로 돌아설 공산이 크다.곳곳에서 치를 일과성 행사가 그렇고 계획한 사업의 상당수가 기념탑 위주이기 때문이다.돌로 무얼 세우기 좋아하는 사회의 변함없는 반영이랄까,두고두고 써먹을 요량이 별로 안보인다.  앞으로를 위해 이런 기회에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 세계화에 따른 자기 몫 챙기기다.가령 일본은 끝내 그들 나름의 연호를 고집한다.그전에는 말할 나위 없다.요새 나오는 책의 발행 연도도 대부분이 ‘헤이세이’(平成) 몇년으로 되어 있다.신문은 ‘서기’와 함께 기록할 망정 방송마저 같은 연호를 뇐다.따라서 나같은 해외 독자는 그때마다 서기로 환산하느라 애를 먹는다.  이슬람역에 따라 생활하는 아랍국가들은 이달 초순부터 벌써 자신들의 신년 행사인 ‘라마단’(금식월)에 들어갔다고 한다.밀레니엄의 무풍지대일 것은 불문가지다.고유의 달력을 사용하는 유대교도의 사정 역시 비슷하다.불교의 나라 태국도,‘중화민국’으로 일관하는 대만도 이하동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들을 본뜨자는 게 아니다.서양을 따라갈 때 따라가더라도 덮어놓고 푹 빠지지는 말자는 뜻이다.알맞은 선에서 내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일본이 자기네 고유의 연대를 고수하여 세계화에 뒤떨어졌다는 소리 못 들었다.나머지 나라들도 잘만 산다.  일출 시각의 빠르고 늦은 차이를 신문들이 초(秒)단위로 나누어 보도하는 걸 보고 과잉친절의 감이 새로웠다.울릉도 독도를,경포대와 정동진의 해돋이를 그렇게 저몄다.서해안의 일몰 시각 또한 미세하고 더할 수 없을 만큼 자상하다.그것도 생활정보의 하나임에 틀림없다.저녁엔 즈믄해의 해넘이를 보내며 감상에 젖고,아침에는 득달같이 동해로 빠져 거대한 희망을 잉태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나쁠 것이 없지만 어쩐지 어수선하다.  서산에서 미움을 날려보내고 동해 가장자리에 서서 새천년을 맞아야 할 날이 아무튼 눈앞이다.그러나 우주공간의 운행에 그다
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게다.집에 조용히 앉아 어제를 되짚고 내일을 겨냥하려는 이들의 마음은 지금어떨까 <최일남·소설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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