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때, 호떡 장사가 초보라며 멋적어하던 청년의 호떡집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 는다. 우리 사회가 바로 지난해를 보낼 때 느꼈던 풍경과는 많이 달라졌다.도시의 불빛은 괜 히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문명의 세기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그런 흐름을 타면서 다시 한 해를 보낸다.한시대의 끝,1999년을 보낸다.
기껏 백년단위로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새천년이란 단위는 얼마나 장구한 것이냐. 우리에게 지난 세월들은 무수한 표정으로 각인돼 있다. 순수가 닳아지고 양심이 낡아진 야만과 폭압의 얼굴을 한 시대는 우리들의 주위를 얼마나 혼란 스럽게 만든었던가. 밀물처럼 밀려와 산란하게 만들던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또한, 새해를 맞으면서 전혀 버리지 못하고 함께 가는 우리들 마음의 병을 본다. 어느새 구제금융시대를 마감한다고 소비가 쏟아지고 있고, 한해를 마감하면서 1000포인트를 뛰어넘은 주식시장이 빛이 났다는데…. 우리 사회 성장의 그늘 아래는 여전히 점심굶는 아동이 허다 하다.하늘 부지런히 농사를 천복으로 여기던 사람들에게 하늘은 그렇게 관대하지 않아 시름겨운 이들도 많이 생겼다.
풍요와 행복이란 이름이 널려 있는 것 같지만, 극심한 빈부간 거리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주위에 대한 온정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집단이기주의,학교의 붕괴위기,엄청난 빨리 빨리병,부실건축,탐욕에 인한 정치권의 회오리바람 등을 남기는 슬픈 현실속에 한해가 지난다.
 인디언들이‘무소유의 달’이라고 부른다는 12월이다. 새천년이란 이름이 이미 빛바 랠 정도로 닳고 닳게 써버린 오늘,정말 우리가 곧 맞이할 새천년은 도전과 희망을 줄것인가. 가만히 있어도 그럴까. 인간들이 얼마나 조급증에 사로잡혔는지, 그런 반성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새로운 해가 떠오르긴 떠오르는건가.
 비자숲을 가본적이 있을 것이다. 비자숲에는 800살이 넘는 이 섬땅의 늙은 비자나무가 있다. 오랜 세월 이땅의 역사와 삶을 응시해오고 있는 그 나무엔 콩짜개난도 엉켜서 한 생을 살고 있다.
넉넉하게 그 나무에 기대어 기생하는 식물들이 많다. 사람도 늙으면 손금이 닳아진다. 고목도 100살을 넘으면 나이테로 헤아리기 어렵다한다. 과연 수령 몇 년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엇는지 모른다. 그 나무들 역시 다시 천년을 맞는다.
그들 천년의 나무앞에서 무슨 할말이 있으랴.얼마나 우리들 얽히고 설킨 인간사를 그러한 천년의 나무는 지켜봐 왔으랴. 누군들 평화롭고 따스한 세상을 꿈꾸지 않으랴. 누군들 평화롭고 따스한 세상을 꿈꾸지 않으랴. 그렇다면, 천년의 나무를 들여다 볼 일이다. 그에게서 하나의 위안을 얻을 일이다.
아, 그런데 우리는 언제 가슴에 그러한 나무 한그루 꼿꼿이 키운적이 있었나. 언제 우리는 누구 인가를 생각해봤는가. 강물도 세월의 덧없음을 말한다. 낚싯줄도 세월의 무상을 표상한다.나무는 그러한 모든 미 망을 온전한 몸으로 포용하는 삶을 산다. 모든 우리 주위의 사물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인간들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움직이도록 하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인간보다 참으로 오래 도록 서 있다. 자신 역시 고독하고 쓸쓸한 삶일 진데, 마냥 그러한 자세로 흐르는 천년을 굽어본다.이형기 시인의 「나무」는 바로 우리가 이 한해를 보내는 이 순간, 마음을 다스려 준다.
 “나무는/실로 운명처럼/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홀로 내려가는 언덕 길/그 아랫 마 을에 등불이 켜이듯/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철 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소란한 마음길 위 에/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나무는 제 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천년의 강물이다”  그렇게,그러한 자세로 우리가 잊고 있었던 그런 넉넉하고 포용력 있는 덩치크고 굵은 밑 둥을 단단하게 뿌리 박고 선 천년의 나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새해는 온갖 마음의 허세버 리고, 어린 비자나무 한그루라도 키울 수 있었으면 한다.그나무의 향이 삿된 마음을 정화시 킬 수 있도록 너울졌으면 좋겠다.
이또한 얼마나 크나큰 욕심이랴. 부디 잘가라, 1900년대여. <허영선·편집부국장대우 문화부장><<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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