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대 할망이 육지를 향해 놓아 준 다리
행정구역명은 제주시 추자면이다. 그런데 추자도에서 제주도 토박이말을 듣기란 쉽지 않다. 대개 호남말투다. 남도사투리의 '징함'이 빠진채 표준화되어 조금은 무미건조하다. 공무원들을 만나보면 조금 달라서 제주도말투가 엿보인다. 자연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간지대라고나 할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전라도 영암군·완도군 등에 딸린 섬이었다. 1946년에 북제주에 편입되었으니 불과 60여년이다. 재미있는 것은 1831년에 잠시 제주목에 이속되었다가 1891년에 완도군 창설로 되넘어간 기록이 나온다. 왔다갔다고나 할까. 그러나 추자도는 다분히 호남문화권에 속한다. 뱃길은 여전히 목포로 열려져있어 농산물 공급은 물론이고 상급학교 진학도 전라도 쪽으로 다녔다. 덕분에 추자도 1세대들은 '전라도적'일 수밖에 없다. 근 20여년전부터 젊은이들이 제주도로 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제주도적'이기도 하다. 공무원들은 대개 제주도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당연히 '제주도적'이다.
추자도 본토박이로서 제주도에서 교육받고 집안에서는 전라도말을 쓰는 사람의 경우, 그 문화적 정체성은 대단히 복잡하다. 제사나 장례의례, 세시풍속 등도 전라도식이다. 제주도 출가잠녀가 아니라 토박이 잠녀들이 물질함은 '제주도적'이며, 전복이나 소라맛은 당연 '제주'다. 묵리의 처녀당에서 해마다 당제를 올리는 바, 당제란 명칭과 더불어 걸궁이란 풍물굿을 동원하는 것은 '전라도적'이다. 풍물굿이 없던 제주도에 '걸궁'이 전파된 것이니, 추자도 걸궁은 본디 한반도 최남단의 풍물굿이 아니었던가 싶다. 흥미로운 연구거리가 아닐수 없다.
![]() | ||
| ▲최영 장군 사당 | ||
그 옛날 추자도를 징검다리삼아 제주도로 향하였다. 추자를 주자(舟子)라 불렀으니 영암·무안·나주·진도 등으로 가는 뱃길이 있었다. 제주로는 애월이나 조천으로 드나들었다. 당연히 이름난 유배지였다. 유배객 중에 해배되어 되돌아가기도 했으나 영영 잊혀진채 섬사람이 된 이도 많다. 정조시대에 안조환은 유배시에 천신만고의 생활상을 이렇게 노래했다. "출몰 사생 삼주야에 노를 지우고 닻을 지니 수로천리 다 지내어 추저섬이 여기로다. 도중으로 들어가니 적막하기 태심하다. 사면으로 돌아보니 날 알 이 뉘 있으리. 보이나니 바다이요 들리나니 물소리라...".
상추자·하추자로 윗섬과 아랫섬이 갈리는데 지금은 추자교로 이어져서 상하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 상추자항은 대서리·영흥리, 하추자항은 신양리 소속이며, 그밖에 예초리· 묵리 같은 아름다운 포구들이 흩어져있다. 단단한 바위밭인데다가 해류가 거칠게 흘러가고 있어 흐리멍텅한 고기들은 살 수가 없다. 참돔이나 감성돔·우럭·농어 같은 고급어종이 바위밭에서 물살과 씨름하면서 육질을 키우며 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바다낚시의 천국'이다. 도처에서 눈에 띄는 이들이 낚시꾼들이다.
추자도는 끊임없이 왜구에게 시달렸다. 왜구들은 제집 드나들 듯 추자군도를 들이쳤으며 심지어 20세기 초반까지도 수적(水賊)이란 이름의 바다도둑떼가 설쳐댔다. 일제시대가 되자 수산자원에 눈독들인 일인들은 대서리에 진을 친다. 학교와 조합을 만들고 삼치어법에 매달렸다. 기선급 선박이 엄청나게 많은 삼치를 잡아서 그대로 상고선에 실어 일본으로 내보냈다. 이른바 추자도 삼치파시는 이들 일본배들 때문에 이루어졌다. 1000여명이 넘는 뱃동서들이 일시에 포구로 쏟아져 들어왔으니 술집·여관이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기생도 들어오고 술꾼들은 취하여 쌈박질도 하고 이래저래 '난장'이었다. 당시의 여관집 등은 흔적이나마 전해지고 있다. 일본인이 물러간 다음에도 삼치어업은 이어졌다. 삼치는 예전 방식대로 잡는 즉시 일본으로 수출했다. 덕분에 파시도 70년대까지 이어졌다.
섬에는 '시와다그물사건'이란 전설같은 일제하 어민항쟁이 전해진다. 1926년 5월14일, 추자면민들이 대거 운집하여 면장과 추자어업조합에 대한 불편·불만에 항의했다. 형세가 대단히 격렬하여 목포와 제주에서 경찰이 들이닥치고 소위 주동자 21명이 검거되어 압송되었다. 어업조합과 면장 등이 공모하여 은행에서 빚으로 어구를 사들이고 갑절이나 비싸게 팔고 주민의견을 무시하고 우뭇가사리를 강제 매입한데서 비롯된 사건이다. 조합장은 주재소와 결탁하여 어민들을 억압하려했고 끝내 예초리의 남녀 700여명이 시위를 일으킨 것이다. 본디 외줄낚시로 필요한 만큼의 고기를 낚다가 일본인들이 대형그물로 싹쓸이하듯이 잡아들이자 이에 반발하였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물반 고기반이었는데 그놈들이 싹 해가지고, 그래서 일어선게지". 일제의 수탈적 약탈어업이 빚은 필연적 결과였다.
추자도에는 딸린 섬들이 42개다. 돈대산에 올라서니 완도군의 청산도가 눈에 들어온다. 청산도에 삼치파시가 있었음은 추자도 삼치파시와 하나였음을 알려준다. 즉 청산도와 나로도, 추자도 일대의 쿠로시오해류가 흐르는 남쪽에 삼치들이 몰려든 것이다. 추자도 최남단에는 관탈도가 있어 귀양객들이 이쯤에서는 다왔다는 생각에 갓을 벗었다는 데서 관탈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관탈도에서는 불과 30분이 채 걸리지 않아 제주항에 닿는다. 그러하니 완도, 청산도, 추자도, 관탈도 등이 징검다리처럼 일렬로 놓여져 육지와 제주도를 연결시켜주는 셈이다. 그 옛날 설문대할망이 제주도와 남해바다를 만들면서 징검다리는 놓아주신 것 같다.
추자군도의 최대 문제는 역시 물이다. 횡견도같은 섬에서는 아예 빗물을 받아쓴다. '물 쓰듯'은 이런 오지에서는 도저히 꺼낼 수 없는 말이다. 추자 본도에서도 담수화공장에서 바닷물로 만든 비싼 민물을 먹고 산다. 그래서 집마다 다른 건 몰라도 거대한 물탱크가 한두개쯤은 갖추어져 있다.
하추자의 돈대산을 오르자 코 아래로 신양항이 굽어보이고 저 멀리 전라도까지 한눈에 잡힌다. 날씨가 맑으면 한라산도 다가온단다. 바람 심한 것을 빼고는 해양성 기후인지라 아열대식물이 생존가능해 동백이 유별나게 잘 된다. 추자도에 딸린 사수도는 상록활엽수림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거지고 흑비둘기와 슴새들이 번식하고 있어 1882년에 천연기념물(333호)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전복·소라·미역·톳·천초 등이 아직도 지천인 곳은 전국적으로도 이만한 곳이 없다.
아, 그런데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상식이 하나있다. 추자도 특산품하면 대개 멸치젓갈을 꼽곤한다. 지금도 멸치젓은 팔리고 있지만 오늘날 추자도의 최고 특산은 추자굴비다. '어획량에서 최고를 자랑하는데 문제는 브랜드 가치가 덜 알려졌다는 점'이란 수협 김금충 상무의 말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조기들이 동중국해에서 추자도 근해로 몰려오기 때문에 엄청난 양이 잡히는 중이다. 예전에는 영광 등지로 생조기를 출하했는데 이제는 아예 굴비로 가공하고 있다. 어족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라 칠산바다를 떠돌던 조기들이 간 곳 몰라 하더니 추자도에서 올라오는 중이다. 지금 추세라면 법성굴비 못지않게 추자굴비 없으면 조상차례도 지내지 못할 날이 다가올 것 같다. 실제로 추자군도에서 최대의 주력품으로 굴비를 키우고 있으니 곳곳에 조기잡이 안강망배들이 눈에 띈다. 조기 잡지않는 비수기에는 돔이나 고등어를 낚으면서 살아가는 중이다.
떠나오면서, 추자도가 '오지'란 생각을 싹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제주항에 1시간만에 도착하였고, 곧바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오는데 1시간 걸렸을 뿐이다. 스티로폼 박스에 얼음을 쟁여서 들고 온 횟감이 서울에 도착할때까지 녹지 않았으니 '멀고도 가까운', 아니면 '가깝고도 먼' 야누스적 표현이 모두 맞으리라. <민속학자·제주대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