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인부터 살기 시작한 유족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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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 가파도나 육지적 관점에서 보면 변방 중의 변방이다. 그러나 세게 해양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가파도야말로 북서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셈이다. 가령 1870년대의 일본 큐수 최남단의 변방 중의 변방인 가고시마의 사츠마번(薩摩藩)이나 시모노세키 주변 죠슈번(長州藩)은 분명히 변방이었다. 그러나 작지만 강력한 사츠마는 일찍이 독립왕국 류큐를 병합하고 해양제국건설에 몰두하였다. 사츠마 군주들은 누구보다 재빨리 문명개화에 나섰으니 이미 19세기에 바쿠후도 모르게 영국유학생을 파견한다. 변방에서 최고의 선진적인 동력이 가동되고 있었다.
역사는 말해준다. 변방을 주목하라! 제국과 식민이 교차하는 변방의 바닷가로 가장 선진적인 사상·종교·과학기술, 심지어 전염병까지 들어왔으니 함부로 중앙와 변방을 차별할 일이 못된다. 베이징에서 해금정책으로 강력하게 바다를 통제하는 동안, 광쩌우 근역의 중국남부 바닷가에서는 해적들이 번성하여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배들이 밀어닥친 곳도 두말할 것없이 바닷가였다. 홍콩과 마카오, 심지어 한반도의 부산 왜관과 진해, 인천 같은 곳은 외국의 문물과 제국의 침략이 들어오는 최전선이기도 했다. 변방은 문명과 문명이 교차하는 열려진 광장이었고 바닷길은 당대의 '하이웨이'였다.
그래서였을까. 가파도에서도 아주 일찍이 학교가 열려 순도 높은 선진적 교육 기회가 부여됐다. 섬에서 길러진 인재들은 이후 제주 현대사의 획을 긋는다. 고통스런 일도 많았으니, 이는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었을 것이다. 가파도같이 변방의 섬에서 심도싶은 교육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은 '변방을 주목하라'는 역사의 교훈과 일치한다.
오늘날의 가파도는 그저 생업에 종사하는, 관광과는 다소 무관한 섬일 뿐이다. 마라도가 워낙 관광화되어 무언가 신선도가 떨어지는 느낌이라면, 가파도는 관광차원으로만 본다면 거의 알려지지않은 것과 진배없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가파도 가는 뱃길이 정겹고 반갑다.모슬포항에서 작은 배를 타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 이내 가파도에 당도한다. 집들이 옹기종기 밀집대형으로 몰려있는 풍경곁으로 빠른 물살이 흘러간다. 섬에서의 삶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1653년, 제주도 남쪽에서 표류하여 14년간 조선생활을 한 하멜은 표류기에서 이곳을 케파트라고 소개했다. 개도, 개파도, 가을파지도 따위의 명칭으로 불리던 가파도를 그렇게 적었음직하다. 여늬 섬들과 마찬가지로 가파도는 목장이었다. 1750년(영조 26년) 제주목사가 소 50마리를 방목하면서 소들을 지키려고 40여가구의 입도를 허락하였다. 공도정책이 이어지던 당시로서는 함부로 섬주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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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 | ||
매년 겨울이면 제주도 서남단 모슬포항에서는 방어축제가 한창이다. 쿠루시오 난류를 따라서 올라온 방어들이 한달여동안 엄청 잡히기 때문이다. 5월부터 세력을 확장한 난류는 12월 정도에서 세력이 약해진다. 방어는 그 난류권을 타고서 들어왔다가 12월이 지나면 일본쪽으로 빠져서 태평양으로 나가버린다. 가파도가 쿠루시오 난류의 직접적 영향권임을 뜻한다.
사실 1∼2월의 방어가 한결 기름지고 맛이 좋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방어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든다. 따라서 12월에 방어축제가 열리는 것이다.
방어는 동해는 물론이고 남해안 추자도·관탈도에서도 많이 잡힌다. 그러나 가파도 근역에서 잡히는 방어를 높게 친다. 시속 6㎞의 빠른 해류에 견디기 위하여 운동량이 많아져 육질이 단단하다. 가파도 같은 섬이 방파제 구실을 해 방어들이 잠시 쉴 틈을 준다. 해역이 용암 암반층이어서 방어들 몸단련에 그만이다. 국립수산과학원의 이윤 연구관은 '가파도 주변 해역이 먹이사슬이 깨지지 않은 청정해역이라 방어들이 몰려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모슬포방어지만 실상 마라도나 가파도방어라 할만하다. 게다가 가파도 사람들 절반 이상이 모슬포항으로 나와서 살기 때문에 하나의 동네로 인정해도 무방할 듯하다.
가파도는 물살이 급하고 곳곳에 암초가 놓여있어 위험한 뱃길이다. 하멜의 표류도 이같은 자연조건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송악산에서 마라도로 오자면 세 개의 등표를 만나게 된다. 가파도 옆으로 서있는 빨강색은 광포탄등표이다. 가파도와 마라도 사이에는 노란색의 도농탄등표가 서있고, 저 멀리 과부탄등표가 보인다. 가파도를 둘러싼 암초들에 이들 등표가 서있다. 겉으로는 잠잠한 해안 같아도 험상궂은 암초들이 해면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과부탄이 되었을까. 하도 많은 어민들이 죽어나가 과부들이 늘어난 덕분에 과부탄이란 이름이 붙었단다.
대개 일반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쉽게 눈에 띄는 이들 등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곤 한다. 등표가 위치한 암초들은 사리 때면 물에 잠기는 곳이 많기 때문에 공사자재를 갖다놓을 수도 없고 공사기간 자체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건축비도 많이 들고 예산은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이들 등표를 관리하는 등표관리원들의 수고도 대단하다. 그리하여, 이들 등표를 모르고서는 등대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가파도에 들릴 때마다 방치된 고인돌들이 마음 아팠는데 다행히 선사문화공원이 조성되어 보존의 길을 찾았다고 한다. 지난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최근 훼손될 위기를 맞고 있는 자연문화유산 가운데 꼭 지켜야할 유산에 가파도 고인돌을 포함시켰다.135기 가운데 75기 정도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뿐, 나머지는 원래 자리를 벗어나 밭담 등으로 쓰이고 있었다. 천만 다행이다. 그 머나먼 시절, 작은 배를 타고 이곳 가파도까지 들어온 탐라의 선조들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거니와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여 길이 이어가는 일은 후손들의 임무에 속하기 때문이다. 고인돌이 열댓개도 아니고 이 작은 섬에 무려 100기 이상이나 존재함은 그 자체로 대단한 문화유산이 아닐수 없다. 고인돌을 다각적으로 문화콘텐츠화하여 소개하는 것도 권해볼 일이다.
가파도에 일주도로도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왕이면 바당올레 하면서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그런 도로를 만들었으면 한다. 가파도 크기는 누구라도 천천히 한바퀴 돌아옴직한 거리다. 멀리 송악산을 바라보며, 때로는 마라도를 바라보며 남도의 바닷길을 걷는 일만큼 최고의 관광, 최상의 건강법이 없을 듯 하다. 어울리지 않는 자장면집으로 도배한 마라도보다는 이왕 관광화에 나선다면 바당올레같은 생태적이고 반속도적인 방향으로 제대로 잡았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같은 사람들도 어쩌다 가파도를 방문하여 천천히 걸어가면서 오랜만에 '비움의 미학'을 만끽하고 돌아오고 싶어진다. 그 옛날 한반도의 최남단에서 이루어지던 선진적인 교육의 열풍까지 생각한다면, 이제 섬은 더 이상 변방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뱃전에서 만난 주민들의 얼굴이 환하다. 모슬포와 가파도를 오가면서 가장 기쁜 일은 뱃삯을 2500원, 즉 본토인에 한하여 지원금이 포함된 저렴한 뱃삯을 내면 된다는 것. 섬을 지키는 사람들은 사실 그 자체 애국자다. 섬을 비우게되면 섬을 지킬수 없게 된다. 교육, 보건의료 따위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섬을 지키는 이들에게 이만한 뱃삯이라도 깎아주어 오고감을 편하게 해준 것은 매우 잘한 일같다. 머나먼 섬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애국이라는 나의 표현은, 섬의 실상을 충분히 안다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닐 것이다.
<민속학자·제주대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