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26.원산시대(8)

   
 
  피카소 작 「한국에서의 대량학살(Massacre Korea)」판지 위에 유채. 1951년  
 
준비된 전쟁, 유도된 전쟁

독립선언문은 1919년(기미년) 3월1일 33명의 민족대표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 민족대표 중의 대표는 의암 손병희였다. 의암과 의형제지간인 서암 김용현은 평안남도 중화군의 한 지주(地主)로서 독립군 군자금을 조달했던 사람이다(지난 24회 참조). 이 서암의 아들 김병하는 해방 후 38선 이북이 공산화되자 일찌감치 가족을 이끌고 월남해버렸다.

김병하의 아들 김중섭(서암의 손자. 평양고보 축구선수. 37회 졸)은 해방되던 해(18세)에 월남, 먹고 살기 위해 서울에서 미군장교의 통역관으로 들어가 몇 년간 일했다. 그런데 미군장교의 현지처가 김중섭의 외모에 반하여 그를 유혹했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 하여 넘어가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된 미군장교가 의리 있는 김중섭을 고마워하며 "이제 한국에서 곧 전쟁이 일어난다. 나는 일본 오키나와로 가게 된다. 너 일본 가지 않을래? 네가 원하면, 내가 널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는 정보활동을 하던 장교였는데, 정말 그의 말대로 1950년 6월25일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전쟁을 북한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한 것은 그날(6월25일) 오후 2시였다. 미국은 즉각 안보리를 소집했다. 한국에 유엔군을 파병하는 결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소련은 이 안보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연히 참석해야 했을 소련이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던 이유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안보리 이사국들이 유엔군 파병을 결의하게끔 의도적으로 방조하기 위해서였다. 6월27일 파병결의. 6월 29일 맥아더가 하네다에서 수원으로 날아와 전장을 시찰. 7월 1일 부산에 유엔군 상륙. 이 과정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을 볼 때, 한국전쟁은 이미 '준비된 전쟁'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자국의 인플레를 막고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국의 물자를 소비할 전쟁이 한국에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그런 나라였다.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기 위해서) 1905년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비밀협약을 맺고 일본의 조선통치를 적극 지지했던 나라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면) 소련과 조선을 반씩 나눠 통치하기로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과 약속했던 나라다. 한국전쟁이 '준비된 전쟁'이었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유도된 전쟁'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그것을 몰랐다. 단지 남북한 사이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빚어낸 로컬 전쟁인줄로만 알았다.

"삼일정신, 삼일정신"

자본주의는 반드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한다. 그 결과 재벌기업의 회장은 신(?)이 되고, 가난한 자들은 부채에 몰려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 모순된 자본주의 사회를 타파하려는 것이 사회주의 사상이다. 동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봉건지주중심의 경제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에 반기를 든 조선식 사회주의 사상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서암 김용현과 사돈지간인 전윤병(全允炳)은 평안남도 순천군의 한 지주로서 일제 때 조선팔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동학이 우리민족의 주체사상임을 설파한 민족계몽 사상가였다. 그는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서울 창동의 10만평 땅을 천도교(동학) 교단에 희사했고, 해방된 지 3일만에 자진해서 토지문서들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지난 24회 참조).

또 전윤병은 해방 후 이북에 공산당이 들어서자 이에 맞서 평양에 청우당(靑又黨)을 창당하고 사무장이 되었다. 청우당은 동학인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당이었다. 우리민족의 주체사상이 공산주의가 아니라 동학임을 내세우기 위해 창당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 공산사회주의는 그게 아니었다. 굶어 죽어가는 북한동포가 있는 반면에 김일성이나 공산당 고위간부들은 초호화 생활을 한다. 계급에 따라 부자와 빈자로 나뉘는 새로운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은 소련을 등에 업고 기존의 사회를 하루아침에 뒤엎어버렸으며 수많은 인명을 살상함으로써 정권(政權)을 잡았다. 어떻게 그런 정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이렇게 기미 독립선언문에는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政權)'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정권이라고 되어있다. 우리나라는 딴 나라에 매여 있는 나라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 이것을 세계만방에 알림으로써 인류평등을 밝히며, 이것을 자손만대에 알림으로써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려는 것이 바로 삼일정신이었던 것이다.

제2의 삼일운동

당시 평양에는 민주당도 있었다. 기독교인이며 오산고보 교장이었던 조만식 선생이 청년동지들과 함께 세운 당이었다. 교사들은 대개 조만식 선생을 많이 따랐다. 민주당 증을 받고는 공산당과 대결한다는 기분으로 의기양양해 했다. 공산당이 얼마나 무서운 당인지도 모른 채, "해방이 되었으니 나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누가 말려?" 하고는 "민주당! 민주당!" 외쳐댔다. 무슨 행렬이 있어서 가보면 조만식 선생이 머리를 깎고 흰 띠를 두르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민주당은 공산당과 합쳤으니 민주당 증을 가지고 나와 새 당증과 바꿔가라."는 소리가 나돌았다. 영문을 모르고 새 당증을 받아보니 '로동당증'이라고 써있었다. 또 조금 있으니 조용조용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만식 선생님을 독방에 가두었대!"

이북에서는 시일(일요일)만 되면 동학기가 한 집도 빼놓지 않고 교인들 집 처마 밑에서 나부꼈다. 동학은 차차 김일성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청우당 사무장 전윤병은 우리민족의 주체사상이 공산주의가 아니라 동학(東學)임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시위를 1950년 3월1일을 기해 일으키려고 암암리에 준비하고 있었다. 이북에서 일어나면 이남에서도 같이 일어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1950년 2월27일 보안원 3명이 전윤병의 집에 들이닥쳤다. "우릴 따라 오시오." 전윤병은 "나 지금 목욕하려고 물 끓이고 있소. 사랑에서 조금 기다리시오." 전윤병은 목욕하려고 나오면서 소매 안에 감춰가지고 나온 무언가를 사랑채 가까이에 있는 낟가리 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목욕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뒤, 아무 말 없이 유유히 보안원들을 따라갔다. 그 광경을 지켜본 부인이 잠시 후 낟가리 속을 뒤져보니 거사일에 읽을 선언문이 나왔다. 부인은 그것을 즉시 불살라버렸다. 공산치하에서 있었던 제2의 삼일운동 '청우당 사건'은 그렇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너 가고 싶은 데 가서 살아라."

평양형무소는 이북 각지에서 잡혀온 동학인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모르고 그랬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하고 손도장만 찍으면 즉시 내보내 줄 텐데도 전윤병 영감님이 저렇게 고집을 부리고 안 나오시는구나." 먼저 나온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었다. 전윤병은 공산당이 회유를 해도, 고문을 해도 절대 굽히지 않았다. 부인이 면회 갈 때마다 넣어준 내의는 전부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들 전상일이 면회를 가니 전윤병은 여윌 대로 여위어 있었다.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눈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상일아, 너 가고 싶은 데 가서 살아라." 들릴락 말락 말했다. 그것은 38선 이남으로 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네 형과 같은 죽음을 다시 보지 않겠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나고, 낙동강까지 내려갔던 인민군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화구 박스만 들고 장응식, 김인호와 함께 석왕사(釋王寺) 뒤의 학이리(鶴二里) 산중 폐광으로 피신해 있던 이중섭은 국군이 들어오자 원산 집으로 내려왔다.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러나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남과 원산 주둔 부대에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원산은 관북지방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로 대혼잡을 이루었다. "어떻게 하지?" "너희들은 떠나야 한다." 이중섭의 어머니는 단호했다. "어머니는 어떻하구요?" "나는 다 살았다. 70을 넘기면 마땅히 죽어야 한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이곳을 떠나라. 나는 네 형과 같은 죽음을 다시 보지 않겠다." (※ 이중섭의 형 이중석은 악질 친일파 부르주아로 재단되어 원산 내무서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던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말에 의해서 이중섭은 남하를 결심했다. 어머니를 원산에 남겨둔 채,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원산고등학교 졸업반이던 장조카 이영진을 데리고, 김인호, 한상진 내외와 함께 피난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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