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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중섭미술관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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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거주지와 이중섭미술관
이중섭이 1951년 서귀포에 피난 와서 거주했던 집을 서귀포시가 1996년에 매입, 복원하여 관광객들이 관람할 수 있는 초가로 만든 것은, 비록 옛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원래대로 복원하지는 못했지만, 참으로 대단한 사업이었다. 만일 당시의 서귀포시장 심중에 예술이 없었더라면 실현될 수 없는 사업이었다. 시장은 무엇이 서귀포의 진정한 발전인지를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주위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가지고 이중섭 사업을 시작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만일 예술을 생산이나 소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실생활과는 무관한 것, 단지 특수계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 정도로만 여겼더라면 서귀포에서의 이중섭 사업은 애당초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짓게 된 이중섭미술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술관 건물은 시각적으로 현란해서는 안 된다. 비록 우주정거장 컨셉의 어린이 놀이터처럼 현란하게 짓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귀포시가 미술관 건물을 짓고 문광부에 미술관 등록을 함으로써 ‘이중섭 이름 석자가 들어가는 미술관’이 국내에서는 더 이상 생길 수 없게끔 선점한 것은 대단히 잘한 것이다. 국내 미술계가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을 탐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주지에서의 이중섭과 가족의 모습
1951년 당시 송태주의 집(이중섭 거주지)에는 이중섭 부부와 두 아들, 그리고 송태주 부부와 네 딸이 살았다. 이중섭의 아들은 첫째가 태현(4세), 둘째가 태성(2세)이었고, 송태주의 딸은 첫째가 경화(11세), 둘째가 경칠(8세), 셋째가 경일(5세), 넷째가 경생(2세)이었다.
지난 27회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이중섭 가족이 살았던 방은 지금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은 1.3평의 좁은 방이 아니었다. 가마니를 깔고 어린 두 아들과 지내야했던 지난 부산 피난민수용소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피난민수용소는 시멘트 바닥, 구멍 뚫린 천장, 군데군데 때워진 녹슨 함석 벽이었는데 비해, 이 서귀포 거주지는 집 바깥에 아궁이가 있어서 군불을 때는 훈훈한 방이었다. 1960년대까지도 송태주의 딸들(첫째, 둘째, 셋째 딸)은 동홍동 미악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집에 군불을 때며 살았다고 한다. 첫째 딸 송경화는 당시 자신의 눈에 비친 이중섭 화가는 ‘조용하고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젖은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송경화의 8촌 오빠인 송상진은 당시 초가집 동쪽(지금 미술관이 있는 부근)에서 살았는데,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 초가집 동쪽 돌담에 와서 담장 안을 들여다보며 ‘마사코상! 마사코상!’하고 부르면 마사코가 안에서 ‘하이! 하이!’ 하면서 나왔다고 한다. 또 어머니가 ‘바다에 가자’고 하면 마사코는 (※ 당시에는 지금처럼 초가집 마당에서 동쪽으로 나오는 출입구가 없었기 때문에) 초가집 서쪽 문으로 나가서 비탈길을 걸어 내려갔고 어머니는 계속 동쪽 길로 내려가 솔동산 사거리에서 둘이 합류해서 같이 바다에 갔다고 한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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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섶섬이 보이는 풍경」 합판위에 유채. 41*71cm. 195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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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바다가 보이는 풍경」종이위에 유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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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서 그린 그림과 실제의 사물을 보면서 그린 그림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후자(寫生화)의 경우에는 사물의 정보가 화가의 눈을 통해서 들어오고 그 정보를 화가가 자기 나름대로 분석해서 그림으로 표현해내기 때문에 상상으로 그린 그림보다 현장감이 더 살아난다. 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그러한 사생화이다. 화가가 현장에서 실제의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려야만 나올 수 있는 감각적인 터치가 화면 가득히 묻어있는 작품이다.
섶섬을 비롯한 모든 사물들의 형태가 사실이든 아니든 나름대로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멀리 바다 한 가운데 섶섬이 그려져 있는 게 원경(遠景)이고, 바닷가 언덕 솔밭 옆에 조그마한 집 한 채가 그려져 있는 게 중경(中景)이며, 가까운 곳에 몇 그루의 나무와 집들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 근경(近景)이다.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린 곳은 어디일까? 그림을 보면, 중경의 바닷가(작은 집이 있는 곳)에서부터 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기껏해야 300m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다. (섶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본다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다로 길게 뻗어 나간 ‘검은여(칼호텔 앞 갯바위)’의 모습이 화면 왼쪽에 잘린 채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언덕 위의 작은 집은 지금 하니문 하우스가 있는 곳으로 보이며, 화가는 파라다이스 호텔 입구에서 정방폭포 쪽으로 간 어느 높은 지점에서 내려다보면서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해안선이 그림과 같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오고 하니문 하우스와 섶섬이 일직선상에 보인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러한데도, 「이중섭 평전」에는 ‘이중섭이 거주지 바로 위에서 그린 것’이라고 적혀있다. 이중섭거주지에서 이 바닷가까지는 직선거리로 1㎞가 넘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바닷가 작은 집과 그 근처가 그림과 같이 세밀히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 그림이 거리도 무시하고, 각도도 무시하고, 중경의 사물들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었다면, 혹시 최석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투시적으로 그렸든 상상해서 그렸든, 어떻든 간에 이중섭은 왜 결과적으로 이런 형상의 풍경화를 그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원산을 떠나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죽을 뻔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서야 가족과 함께 여기 서귀포에 도착한 이중섭이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섶섬의 봉우리를 정점(頂點)으로 하여 화면 좌측아래의 짙은 나무와 우측아래의 명암대비가 큰 기와지붕으로 연결되는 커다란 삼각형구도를 우리는 이 그림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삼각형구도가 주는 ‘안정감’, 당시 이중섭은 그것을 찾고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평론가들의 견해
이 작품 「섶섬이 보이는 풍경」에 대해 최석태 저 「이중섭 평전」 175쪽에는 “구도와 화풍에서 사실주의 화풍이 보이며, 안정감과 고요의 감정이 두드러진다.”라고 적혀있다. 또한 「이중섭 평전」에는 이 그림에 대한 이경성 등 다른 사람들의 평도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있다. “남화(南畵) 같은 부드러움에 차 있다.” “시원한 공간 전개, 온화하며 평화스럽고 쾌적한 분위기의 풍경이 차분한 필치와 다듬어진 색채로 묘사되어 자연의 봄기운을 감지케 한다.”
그러나 오광수 저 「이중섭」 163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평범한 풍경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중섭의 체취를 느끼기에는 미흡하다. 싸인이 없는 걸 감안하면 단순한 스케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본격적인 작품으로 작가 자신이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주에는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호재 기증의 「섶섬이 보이는 풍경(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해설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