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31. 제주도시대(5)

   
 
  「서귀포의 환상」  합판에 유채. 이중섭 작. 1951년.  
 
이중섭의 예술혼

이중섭을 모델로 한 오성찬의 중편소설 「어두운 시대의 초상화」가 발표된 것은 1987년 10월이었다. 그보다 1년 전인 1986년, 오성찬이 이중섭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이중섭거주지(서귀동 512번지)를 찾아갔을 때 집 주인 김순복 할머니가 오성찬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그 사람은 어쩐 일인지 소 그림을 잘 그려서마씀. 하루는 저 동산에서 하루 종일 매어둔 소만 쳐다보는디 아, 소 주인이 이상케 생각을 안 할 겁니까? 그때사 산에 폭도도 우굴우굴할 때인디. 그래 그 사름이 네가 웬 놈이냐? 그래도 시원한 말대답을 못하니까 그 굶은 사름(이중섭)을 멱살을 잡아 땅에 메다꽂았수다. 이디가 이만큼 부어서 온 거라마씀."

그러면서 김순복은 자신의 광대뼈 있는 데를 부풀렸다가 놓았다. 김순복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오성찬은 속으로 울었다고 한다. 도대체 그림이 뭐 길래, 사람이 굶어 죽게 됐는데도 그렇게 그림만 그리고 있었단 말인가? 그 궁핍 속에서도 이중섭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며 놀고 있는 저 「서귀포의 환상」을 그리지 않았던가. 무엇이 그를 그토록 의연하게 만들었을까? 이중섭에게는 이상(理想)이 있었으리라. "그 의연함이야 말로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불타는 예술혼이 그리 시킨 것이었음을 같은 길을 걷는 예술의 후배로서 감히 증언할 수 있다."고 오성찬은 자신의 소설을 소개하는 글에 적고 있다.

부엌 비슷한 데

또 오성찬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래 그 사람이 기거하던 방은 어딥니까?" 나의 질문에 할머니는 "볼 게 없다"고 우기다가 마침내 집 한 녘 기슭에 잇대어 지은 부엌 비슷한 데로 들어갔다.

'집 한 녘 기슭에 잇대어 지은 부엌 비슷한 데'라… 나는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처음엔 몰랐다. 그러다가 나중에 화가 조관형의 그림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조관형이 이중섭거주지에 세 들어 살았던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그가 최근에 와서 그 80년대를 회상하며 그린 그림들 중에 이 '부엌 비슷한 데'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거주지 모습」  종이에 연필. 조관형 작. 2007년.  
 
   
 
  「부엌모습」  종이에 연필. 조관형 작. 2008년.  
 
   
 
  화가 조관형  
 
조관형이 그린 이중섭거주지를 보자. 비탈을 깎아내고 지은 집이라서 아무래도 돌담을 쌓은 바닥이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돌담과 가옥이 맞닿는 지점에는 제법 큰 암석이 있는데, 돌담은 그 암석을 살짝 비껴서 설치되어있다. 이 돌담과 가옥 사이에 생긴 삼각형의 공간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 '부엌 비슷한 데'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처마 밑에서부터 돌담 위에까지 각목을 걸쳐놓고 그 위를 슬레이트로 덮어 부엌지붕을 만든 뒤, 남쪽에 함석 문짝을 갖다 붙인 것이다.

"당시 이 집은 마루를 가운데 두고 동서 양측에 남북으로 방을 하나씩, 모두 네 개의 방이 있었다."고 조관형은 말한다. 조관형이 살았던 방은 동측 북쪽 방이었는데 이중섭 화가가 6·25 때 피난 와서 살았던 방이라고 주인 김순복과 셋째 딸 송경일이 알려줘서 무척 감격했다고 한다. "원래는 주인집 마루에서 이 방으로 들어오는 문이 있었는데, 그 문에 합판을 대고 도배를 한 것은 아마도 그 전에 세를 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며 조관형은 자신이 방으로 들어갈 때는 주인집 마루를 통하지 않고 따로 만든 이 '부엌 비슷한 데'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집 주인네 부엌은 이 집 서쪽 끝에 있다. 이렇게 부엌을 따로 만든 것은 세든 사람이 편하게 쓸 수 있게 하기 위한 집 주인의 배려였음을 알 수 있다.

행복의 발견

이중섭 가족은 여기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마사코는 식량이 모자라 밭에 버려진 채소도 주워오고 양파 걷는 일에 품을 팔아서 양파를 얻어오기도 했지만, 남편과 함께 생활할 수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1997년에 당시를 회상했다. 이중섭도 아내를 피난민 수용소에 놔두고 저 혼자 거리를 떠돌아야 했던 부산에서의 그 고통을 생각하면 월남 이후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으리라. "태현아, 게 잡으러 가자." 태현을 업어서 띠로 매고 단지 하나를 들고 자구리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던 서귀포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했으랴! 원산항에서도 게를 보지 않았을 리 없고 동경에서도 게 요리를 먹지 않았을 리 없는 그가 "서귀포에 와서 게를 발견했다"는 것은 곧 행복을 발견한 것이다.

겡이 냄새가 나는 거주지 부엌

현재 이중섭거주지와 이중섭미술관의 1일 관람객 수는 적을 때는 100명이 채 안 될 때도 있지만, 많을 때는 300명을 넘기도 한다. 다른 관광지에 비하면 적은 숫자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관람객이 미술에 조예가 있거나 화가 이중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임을 감안할 때 화랑 또는 미술관 계통에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40일 동안에 10만명의 관람객을 돌파하고도 또 연장 전시를 해야만 했던 호암갤러리에서의 '이중섭 30주기 회고 특별전' 등 이중섭 화백의 유명세를 감안한다면, 이 숫자보다 최소한 10배는 더 와야 정상이다. 더구나 여기는 관광지가 아닌가. 바다 건너, 산 넘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비행기 타고 온 사람들이 볼거리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곳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는 화살을 과녁에 정확히 맞히듯이 목표점을 꿰뚫는 유효한 홍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제주도로 관광 갈 예정인 사람들, 또는 제주도를 관광 다녀온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서귀포에 이중섭거주지와 이중섭미술관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 그리고 이것은 다음에 말하려고 하는 두 번째 문제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이중섭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그린 자리, 그 '명작의 고향'을 서귀포시가 (현장감이 열려있는, 생동감이 살아있는) 현대미술 '설치작품'으로 개발 관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작품은 미술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보는 감상자도 작품이다. "내 그림은 전부 다 가짜다"라고 이중섭도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미술은 감상자 중심의 미술로 가고 있다. 박제가 된 채 박물관에 걸려있는 작가 위주의 미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조명등이 켜져 있는 '실내 전시실' 그 답답한 공간을 벗어나 현장감이 열려있는, 생동감이 살아있는 환경미술관(Environmental Museum)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이중섭의 예술정신을 제대로 잇는 진정한 이중섭 미술관의 모습이다. 이중섭미술관이 왜 제주도에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이중섭거주지를 '이중섭 생가'라고 부르면서 이중섭이 제주도 사람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이러한 관광객들에게 관광 안내원이 다음과 같이 소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이 마당은 이중섭 화백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그렸던 곳입니다. 자! 비교해 보십시오. 중간에 새로 지은 건물들이 앞을 좀 가리고 있기는 해도 그림과 똑같은 실제의 풍경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부엌은 이중섭 화백이 겡이를 삶아먹었던 곳입니다. 수도자가 고행을 통해 신을 만나듯이, 이중섭은 이 부엌에서 겡이로 연명을 하면서 영감을 얻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부엌에서는 가끔 겡이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자! 눈을 감고 조용히 이중섭의 겡이 냄새를 맡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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