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이중섭 거주지 마당에서 보는 부엌 입구

 
 
# 팔자 좋은 사람

서귀포시가 '이중섭 문화의 거리 지정'을 비롯한 이중섭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일찍이 서귀포에서 오성찬이 이중섭을 모델로 한 중편소설 「어두운 시대의 초상화」를 썼기 때문이리라.

오성찬은 자신이 이중섭에 대해 맨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신이 중등학교 미술과 준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할 즈음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시인 구상(具常)이 서귀포에 와서 선주 강임용으로부터 얻어간 이중섭 그림 「서귀포의 환상」이 신문에 크게 소개되면서 이중섭이 갑자기 유명해지자 은근히 질투심이 생겼다는 것.

"이중섭 그가 뭔데 깃발도 아니면서 이렇듯 나부끼고 걸핏하면 내세워지는가."

10년쯤 지난 뒤, 오성찬은 미술교사 생활을 청산하고 신문기자가 되었다. 그 무렵 서귀포에서 밀감을 싣고 부산으로 가던 화객선 남양호가 침몰하여 승객과 선원 338명이 바다에 빠져죽는 사건이 있었다.

오성찬은 이 사건을 취재하러 선주 강임용네 집엘 갔다가 궤에 보관되어있는 이중섭 그림들을 보게 되었다.

"지금 이중섭 그림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구상이 10년 전에 공짜로 얻어간 「서귀포의 환상」이 1억원에 팔렸는데 돈이 아쉬워진 강임용이 반환소송을 걸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후, 오성찬은 대구의 한 신문사 다방에서 우연히 구상을 만나 그 그림의 행방을 물었다. 그리고 구상의 형님 중에 순교한 분이 있어 그분의 성소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성(호암갤러리)에 팔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자신이 서귀포의 한 다방에서 처음 개인전을 열었을 때 사람들이 "서귀포에 화가 났네"라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는데, 이중섭 그림은 부르는 게 값 아닌가. 오성찬은 이중섭을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이중섭의 생애를 너무 신비화 또는 미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송태주의 초상' 이중섭작 1951년

 
 



#어두운 시대의 초상화

그러한 오성찬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그가 1986년 6월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이중섭 30주기 기획특별전'을 보면서부터였다.

40일 만에 10만 관객을 돌파함으로써 연장 전시까지 해야 했던 그 전시장에서 오성찬이 본 것은 관람객들의 진지한 관람태도였다.

이중섭 작업의 치열함과 회화재료의 새로운 개발도 차츰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는 전쟁 때 빈곤 속에서도 열심히 그림을 그린 화가였는지도 몰라." 오성찬은 전시장을 나오면서 팸플릿과 엽서 한 세트를 살 때 손이 떨렸다고 한다.

"우리는 이중섭이 천재니까 그의 예술도 당연히 훌륭할 거라는 미망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글이 당시 한 주간지에 실렸다.

이 글을 읽은 오성찬은 서귀포에 돌아오자마자 이중섭의 자취를 찾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오성찬은 이중섭의 허점을 캐는 일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중섭의 허점은 옛날에 '초상화를 그려먹은 것'에서 꼬리가 잡혔다. TV로 방영되고 있는 이중섭 회고 프로를 보던 사람이 "저 사람이 피난 왔을 때 우리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발설한 것이 그 계기였다.

알고 보니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초상화는 「송태주의 초상」뿐만이 아니었다. 그 무렵 군대 갔다가 전사한 세 젊은이의 초상화까지 모두 4점을 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오성찬은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 값으로 고구마 한 말을 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굶주림 앞에서는 장사가 없구나. 그도 순백의 화가만은 아니었다."라고 이중섭의 허점을 찔렀다.

그러나 오성찬은 이중섭거주지를 찾아가 이중섭 가족이 썼던 방과 부엌을 보고나서는 마음이 180도로 바뀌었다.

"처마와 돌담 사이에 슬레이트를 얹어 만든 부엌 비슷한 곳" "창호지를 바른 마구다지 문이 있고, 그것을 여니까 형편없는 방 천장에 백열전구를 빼어버린 소켓트만이 덩그렇게 매달려 있었다." "좀팍만한 방, 누기진 벽"이었다고 오성찬은 말한다.

「송태주의 초상」 종이에 연필. 이중섭 작. 1951년이중섭 가족이 거주했던 방을 보고 온 날 저녁, 오성찬은 왕창 취했다. "전쟁이 슬프고, 그로 인한 중섭의 인연이 너무 비참하고, 우리들 그림 작업 신세가 슬퍼서 많이 마시며 떠들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오성찬의 생각은 이미 바뀌어져있었다. "중섭의 허점을 캐러 여러 날 정신없이 돌아다녔으나 이제는 중섭이 받은 열 달란트와 나의 한 달란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 1987년 10월에 발표한 소설이 바로 「어두운 시대의 초상화」였다.

   
 
  이중섭 거주지마당에서 본 부엌입구. 1980년대 초의 모습. 조관형 그림  
 
# '또 하나의 명작'의 고향

이중섭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그린 자리, 그 명작의 고향은 이중섭거주지 마당 안에 있는 한 지점이었는데 1997년 서귀포시가 거주지 복원공사를 할 때 가옥의 방향을 틀어 그 자리에 초가집을 세움으로써 복원과 함께 사라졌다고 나는 지난 30회에서 말했다.

또 31회에서는 이중섭 거주지가 '현장감'이 열려있는, '생동감'이 살아있는 환경미술관의 설치미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이중섭 가족이 생활했던 옛 모습 그대로 부엌 아궁이에 실제로 불을 때면서 겡이 삶는 냄새를 관광객들이 맡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서귀포시는 왜 이중섭 사업을 하는가? 서귀포시가 조선일보사를 동역자로 삼아 매년 9월 서귀포 칼 호텔에서 이중섭세미나를 공동 주최해오고 있는 것은 서귀포 이중섭 사업을 '전국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도 제1회 이중섭세미나의 주제를 <이중섭과 서귀포>로 잡은 것은 오로지 이중섭만이 존재하는 이중섭 사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서귀포의 그 어떤 것'이 깃들어있지 않는 이중섭 사업은 무의미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섭거주지의 부엌과 방'은 서귀포시가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다.

왜냐? 그곳은 천재 오성찬이 이중섭을 모델로 한 중편소설 「어두운 시대의 초상화」를 탄생시킨 '또 다른 명작'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집으로 1993년 제19회 한국소설문학상을 받은 오성찬은 나중에 이중섭거주지 복원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이미 공사가 그렇게 끝난 것을 어떻게 하랴.

"이중섭이 피난 때 살았던 한 평 남짓의 방과 부엌. 원형에 약간 손을 댄 것이다."라고 서귀포시의 잘못을 감싸주면서, 다음과 같은 추사 김정희의 글로써 자신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진짜 나도 역시 나고, 가짜 나도 역시 나다. 진짜 나도 역시 옳고, 가짜 나도 역시 옳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어느 것이 나라고 할 수 없구나. 제석궁(帝釋宮) 구슬들 켜켜로 쌓였거늘 누가 능히 그 구슬들 속에서 그 참 모습을 가려낼 수 있을까. 하하."

 

   
 
 

이중섭 가족이 생활했던 방. 1980년 대초의 모습. 조관형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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