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딛는 제주 잠녀의 삶-제주시 동복어촌계

   
 
   
 
‘생이 다리 하나로 잔치한다’고 했다. 농토도 빈약했고, 인근 북촌이나 김녕에 비해 바다도 풍족하지 못했다. 해풍에 밀려온 감태나 모자반 같은 거름용 해조를 한 짐 지고 난 다음에야 겨우 아침을 먹었었다. 풍족하지 않았기에 이곳 사람들은 바다를 놓지 않았다.

# 바다 그리고 굳센 여자

구좌읍의 첫 마을, ‘곳막(邊幕)’ 또는 ‘골막’이라 불리는 이곳 여성들은 척박했던 환경만큼이나 굳세다. ‘굳세다’는 표현이 지나치게 강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지독한 흉년이 들었을 때 사재를 털어 제주 백성들을 배고픔으로부터 구한 여인 김만덕은 이곳 동복 출신이다.

혹자는 동복 잠녀들을 ‘전국구’라고 표현한다. 60줄을 넘어선 잠녀들 중에는 생계를 위해,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고향을 떠나 험한 바다에 몸을 던진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동복의 상시잠녀는 30여명. 40대 초반의 ‘어린’ 잠녀도 있지만 대부분 50~60대다. 84살의 강복순 할머니는 올해 물질을 그만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때만 되면 바다로 나섰지만 물에서 죽을 뻔한 경험을 한 뒤에는 바다에 등을 돌렸다.

찾아간 즈음은 소라 작업이 한창일 때였지만 잠녀탈의장이며 바다는 생각보다 고즈넉했다.

지난해는 엔화 환율 하락으로 잡아도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 소라 작업을 접었다면 올해는 ‘물건’이 없어 바다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동복의 소라 TAC물량은 4500㎏지만 4월까지 300㎏를 겨우 잡았다.

   
 
   
 
지난해만 천초 3000㎏와 톳 3000㎏를 작업했다. 톳은 어촌계 공동작업을 통해 채취한다. 바다는 그러나 공평하지 못했다. 동산과 동하, 서산과 서하 등 4개 마을에 따라 많게는 20만원에서 적게는 3만원까지 희비가 엇갈렸다.

그래도 바다를 의지하지 않고 사는 방법은 모른다. 김홍선 어촌계장(53)은 “이곳 잠녀 중에도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실력이 좋은 잠녀는 전라도 출신”이라며 “처음에는 바닥에 손을 집고 겨우 작업에 참여하던 것이 지금은 깊은 바다도 거침없다”고 말했다.

# 체험 어장으로 바다를 열고

동복리는 제주체험관광을 했거나 희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법 알려져 있다. 월정리까지 제주를 동쪽으로 돌 때 처음 만나는 해안도로의 멋스러움도 일품이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운영된 체험어장은 꽤 입소문이 났다.

당시 북제주군에서 종패 지원을 받아 관광객이 찾아올 즈음 바다에 뿌리고 직접 잡거나 잠녀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동복 바다 역시 동바리와 집앞, 소여, 섯바리 외에도 ‘체험어장’으로 구분한다.

소여와 펄개 작업장은 공동채취·공동판매·공동분배 원칙을 적용한다. 기준에 미달한 작은 소라를 모아 키운 뒤 날짜를 정해 작업을 한다.

치어와 넙치를 양식하는 육상 양식장 4곳과 동쪽 경계 전극소까지 동복 바다 역시 편하지는 않다.

   
 
   
 
육상 양식장 앞 바다도 참기 힘든 냄새로 작업이 힘들었다. 지금은 단속 등을 통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사료찌꺼기를 따라온 성게들이 넓게 자리를 잡으면서 해조류며 소라나 전복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축담을 쌓은 소여도 많은 얘기를 남겼다. 뭍에서 돌을 실어 날라 여 위에 정방형 축담을 쌓았다. 물이 들면 사각틀을 제외하고는 물에 잠긴다. 오가는 배들의 안전운항을 도왔다는 말도 있다. 땟목과 밧줄을 이용해 소여로 톳 작업을 하러 갔다가 바다가 거세지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축담 위에 수확물을 올려두고 빈 몸만 서둘러 돌아온다고 했다.

예전에는 물건 가득한 망테기를 대신 짊어질 ‘풍중’이며 나이어린 아이들이 해안가에서 잠녀들을 기다렸다. 지금은 잠녀들이 체험어장을 북적이게 할 관광객을 기다린다.
단순히 바다가 주는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법을 배워 가는 거라고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발로 딛는 잠녀들의 삶’은 제주시 추자어촌계를 두차례에 걸쳐 정리합니다. 관련 내용은 해녀박물관 홈페이지(www.haenyeo.go.kr)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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