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도 신문삽화 거절… "빵을 위해 그리지 않아"

   
 
 

'범일동 풍경'이중섭 作.

 
 


미학적 태도

"내 친구 중섭이 있소. 멋진 사람인데 신문 삽화라도 맡겨주구려. 현재 부두에서 노동을 하는 모양인데……"
경향신문사 문화부장 김광주를 찾아간 구상은 이중섭의 일거리를 청탁했다.

김광주는 필화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대한민국 공보처장 이철원을 모델로 한 소설 「나는 너를 싫어한다」를 신문에 연재했다가 이철원에게 불려가 따귀까지 얻어맞고는 그때의 의분심으로 관철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내일부터라도 하지." 김광주가 승낙하자 구상은 기뻤다. 이중섭은 제주도에서 돌아와 낮에는 부산항 부두에서 오일 드럼을 굴려 화차에 싣거나 낡은 선박에 페인트 콜타르칠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저녁에는 광복동에 나가 예술가들을 만나고, 밤에는 오산 후배 김종영의 범일동 판잣집에 가서 자지 않는가.

바라크 같이 좁은 집이어서 그의 아내 마사꼬와 어린 두 아들을 할 수 없이 피난민수용소에 집어넣고는 가끔씩 빼내어 이 판잣집에 데려오곤 하는데, 이제 그들의 주거와 생계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게 되어 구상은 기뻤던 것이다.

다음날 구상은 다방에서 이중섭을 만났다. "놀라지 말게. 경향신문 연재소설 삽화를 맡아왔네. 자네 이것만 그리면 형편이 풀릴 거야."

그랬더니 기뻐할 줄 알았던 이중섭의 표정이 의외로 담담해지면서 "삽화는 못해. 상, 용서해주게."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왜?"
물었더니 이중섭은 "자네가 수고한 것은 알지만, 내가 하이야 타고 가는 여자를 보았나, 레스토랑에서 밥 먹는 연인을 제대로 보았나…아무래도 그건 못하겠네."라고 하는 것이었다.

구상은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공감했다. 그렇다. 그에게 삽화를 그리라고 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다. "그래, 자네에게 그런 걸 시키는 게 아니지. 섭, 술 마시러 가세."

이 일화는 이중섭이 어떤 예술가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는 빵을 얻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니었다. 어릴 때 사과를 주면 관찰부터 하고나서 그림을 그린 뒤에야 비로소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부유하다고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부유할수록 부족한 것은 더 있기 마련이다.

오산고보시절이나 일본유학시절에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식민지민으로서의 갈망이 컸을 것이고, 8·15 해방과 6·25 한국전쟁 중에는 분단 조국에 대한 통일에의 염원이 그 어떤 것보다도 컸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린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백남준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회가 썩을수록 예술이 발달한다고. 창작은 배부른 돼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높은 곳을 바라보는 궁핍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중섭 예술의 미적인 것은 화려하거나 값비싸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이야 타고 가는 여자를 보았나, 레스토랑에서 밥 먹는 연인을 제대로 보았나."라고 한 것은 자신의 삶에 뿌리를 둔 진정한 예술창작을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중섭(왼쪽)과 김이석.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의 이중섭 작품전 때 찍은 사진.  
 


   
 
  1952년 10월 25일에 발간된 주간 「문학예술」 제5호 중 김이석의 단편소설 「휴가」에 곁들인 이중섭의 삽화.  
 

「문학예술」지에 그린 삽화

이중섭의 그러한 미학적 태도는, 같은 해, 그가 「문학예술」지 삽화를 그린 것에서 드러난다. 「문학예술」지는 주간지이고 경향신문보다 지명도가 낮다.

원고료나 제대로 나왔을까. 그런데도 이중섭이 경향신문을 마다하고 「문학예술」지 삽화를 그린 것은 신문연재소설의 통속적인 것보다는 「문학예술」지의 뚜렷한 의식이 훨씬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위 두 번째 그림이 그 중의 하나인데, 최석태 저 「이중섭 평전」에는 김이석의 소설 「휴가」에 곁들인 삽화로서 1952년 10월 25일 「문학예술」지 제5호에 실렸던 것이라고 적혀있다.

김이석(金利錫, 1914~1964)은 평양 광성고보 출신으로서 이중섭보다 두 살 위였다. 해방 후에는 북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문학에 환멸을 느꼈던 사람이다. 월남 후 1954년에는 「문학예술」지에 그의 대표작 「실비명」을 발표했고, 이어서 「뻐꾸기」 「동면」 등 사회성 짙은 수작들을 발표했다.

그러니 그의 「휴가」가 어떤 소설이었는지는 대략 짐작이 간다.
「휴가」의 삽화로 그려진 이 그림은 뺑뺑이꾼의 '찍기'를 그린 것이다.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난 필자는 어릴 때 성남국민학교와 부산진국민학교 사택에서 살았다. 뺑뺑이꾼들은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아이들을 유혹했다.

그렇지만 뺑뺑이꾼의 속임수를 아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어쩌다 운 좋게 맞아주면 몰라도, 대부분 허탕을 친다. 회전판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찍기를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뺑뺑이꾼은 일부러 경품을 따게 해준다.

맛 들린 아이들은 자신이 정말 잘 찍는 줄 알고 자꾸 하게 되고, 돈을 잃으면서도 언젠가는 크게 딸 줄 알고 계속 찍기를 한다. 그러다가 다 털리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런 아이의 고무신 발뒤꿈치가 이 삽화에 그려져 있다. 보라. 경품은 3번 위에 올라가 있는데 화살은 2번에 꽂혀있지 않은가.

 

 
 
  미국 구호품인 허쉬 초콜릿을 들고 있는 피난민 어린이. '조지 풀러 유작전'  
 

그림을 보면 완장을 찬 미군헌병(MP)의 팔이 화면 한쪽에 그려져 있다. 왜 미군헌병을 그린 것일까. 당시 지나가던 MP가 발을 멈추고 뺑뺑이꾼을 쳐다보는 모습이 공교롭게도 이중섭의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다만 빈 화면이나 채우려고 그렇게 그린 것일까.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이중섭을 훌륭한 화가라고 말할 이유가 하나도 없게 된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이해관계가 빚어낸 로컬 전쟁이 아니라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 미국과 소련이 빚어낸 '준비된 전쟁'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이 그림은 속임수를 쓰는 미국을 뺑뺑이꾼에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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