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일본 패전후 아내와 아이 일본으로 보내…생이별


이중섭이 「문화 예술」지에 그린 삽화들

가족이 일본으로 가다
일본 정부는 패전 후 한국에서 곧바로 귀국하지 못한 일본인들을 1952년에도 귀국 조치했다. 이중섭은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일본으로 보내고 자신은 뒤에 따라가기로 했다. 마사꼬는 두 아들을 데리고 초량동에 있는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제3차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중섭이 1953년 5월 중순 아내에게 쓴 편지에는 "1년이 넘게 멀리 서로 헤어져 있으면서"라고 적혀있고 1954년 1월 7일에 쓴 편지에는 "2년 가까이 연기에 연기를 거듭해서"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가족과 헤어진 것은 1952년 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태현(47년생)은 5세였고 태성(49년생)은 3세였다. 이 연재 15회에서 필자가 소개한 적이 있는 마사꼬의 조카는 2003년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일본에 도착한 이모는 기침을 할 때마다 각혈을 했고 아이들은 벌레가 피부를 파먹은 것처럼 영양실조 상태였습니다."
마영일의 사기횡령
마사꼬의 아버지는 1952년, 그해 초에 세상을 떠났다. 군부와 밀착해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한동안 경제활동이 규제되어오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규제가 풀렸지만 곧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마사꼬의 친정집에는 어머니와 함께 오래 전에 과부가 된 언니가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돈이 있어야 남편이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에 올 수 있을 텐데… 마사꼬가 걱정하던 차에 마침 한국에서 마영일이 찾아왔다. 마영일은 이중섭의 오산 후배였다. 그의 형이 연극을 한다고 이중섭과 어울려 다녔기 때문에 안면이 있었다.
고은의 책에는 마영일이 광복동 파출소 앞에서 서점을 경영하고 있었다고 적혀있고, 최석태의 책에는 통운회사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적혀있다. 어떻든 마사꼬는 일본 서적이 부산 서점에서 굉장히 인기가 있어서 한국에 갖다 팔면 돈이 된다는 얘기를 마영일로부터 전해 듣고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즉 마영일을 믿고 그에게 책을 맡기면, 그가 책을 팔아 원금은 마사꼬에게 부쳐주고 이익금의 일부는 이중섭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다.
마사꼬는 동경 대학가에서 서점을 하는 친구에게 약속어음을 써주고 5만엔 상당의 책을 구입, 1차로 부산에 보냈다. 처음에는 마영일이 책을 팔아 원금도 부쳐주고 이익금도 떼어주었다. 그러나 두 번째 가져간 27만엔 상당의 책은 이익금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금도 부쳐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마사꼬는 서점 친구에게 써준 약속어음을 고스란히 빚으로 안게 되었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
1953년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적혀있다.
(3월) "당신의 불안한 처지, 매일 밤 나쁜 꿈에 시달리며 식은땀에 흠뻑 젖은 당신을 생각하고 대향은 남덕군에게 그리고 어머님에게 정말 미안하고 면목이 없소. (중략) 마씨의 돈은 내가 직접 받아가지고 갈 테니 걱정 마시오. 이제부터는 애처(愛妻), 애아(愛兒)를 위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으니까 염려하지 말고 나쁜 꿈과 식은땀에 시달리지 않도록 충분한 섭생을 하시오."
(3월말) "부산에 가서 광석 형을 만나지 못하면 서울까지 가서라도 자형과 마씨의 건 확실히 받을 수 있도록 법적 수속을 하고 돌아올 것이니 아무 염려 말고 오직 건강회복에만 정성을 다해주시오."
(4월 20일) "대향이 그곳에 가는 것은 마씨의 건이 완전히 해결된 뒤가 되겠소. 마씨 건은 안심하시오. 마씨는 배 사정으로 좀 늦어져 아직 부산항에는 입항하지 않았소. 내일 해운공사에 가면 확실하게 알 것이오. 모레 또 마씨 건에 대해서 자세한 편지 보내리다. 안심하고 기다려주시오."
(4월 22일) "마씨는 아직 부산항에 입항하지 않고 있소. 마씨가 부산항에 입항하자마자 해운공사 쪽에서 알리기로 되어있으니까 안심하시오."
(5월 22일) "마씨 건은 대체로 결말을 지었소. 신주꾸(三宿)로 갈 배편을 대향은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
(5월 23일) "마씨 건은 8만엔 틀림없이 받았소. 인편에 부탁하면 다시 복잡해지므로 대향이 직접 가지고 갈 작정이오. 나머지는(22만 7400엔) 8월 10일까지 잔금을 완전히 지불하게끔 마씨한테서 (연대보증인 세 사람의 도장을 찍은) 차용증서를 받아 놓았고. 이번에 8월 10일까지 잔금을 완전히 지불하지 않으면 곤욕을 치를 것임(3년 동안 형을 받음)을 마씨도 아니까 반드시 지불할 겁니다. 조금 늦어지지만, 상세한 설명은 만나서 하기로 하고 조금도 염려하지 말아요.
잔금은 매월 조금씩 지불한다는 약속도 되어 있소. 대향은 그동안 한 점의 작품도 제작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마씨 건에만 매달려 있었소. 요만한 현금밖에 받을 수 없었던 게 유감천만이오. 사정 양해해 주시오. 요전에 마씨의 일이 경향신문에 났기에 신문을 보냈는데 받았는지요."
(6월 9일) "내일은 배 형편과 마씨에 대한 것을 자세하게 써 보내겠소.
(6월 10일) "마씨의 건을 자세히 써 보내고 싶소만 얼마 안 있어 우리는 만나게 될 테니까… 만났을 때에 얘기하도록 합시다. (중략) 마씨 건은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주시오."
「문학예술」지에 그린 삽화
극작가 오영진은 1952년 7월 박남수와 함께 「문학예술」지를 창간했다. 오영진과 박남수는 이중섭의 고향친구. 「문학예술」은 처음에는 주간이었으나 나중에 월간으로 바뀐다. 제5호(1952년 10월 25일 발간)에 김이석의 단편소설 「휴가」가 실렸는데 이중섭이 이 소설의 삽화를 그렸다. '미국의 속임수를 뺑뺑이꾼의 속임수에 비유해서 그린 것'이었다고 나는 지난 38회에 말했다.
이중섭은 그밖에도 10여점의 삽화를 「문학예술」지에 남겼다고 최석태 저 「이중섭 평전」에 적혀있다. 그중 석 점의 삽화를 소개했는데 위에 게재한 것이 그것이다.
맨 왼쪽은 붓으로만 그린 것이다. 먹물이 품어져 나오지 않았고 'ㅈㅜㅇㅅㅓㅂ' 싸인이 제대로 써 지지 않은 것을 보면 화선지가 아닌 일반 모조지에다 일반 수채화 붓으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시에 우동과 간장으로 하루에 한 끼나 두 끼밖에 먹지 못했고, 심한 기침으로 목이 쉬고, 몸이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다. 겨울의 거센 바람은 불을 땔 수 없는 산꼭대기 판잣집 사방 아홉 자의 방을 냉방으로 만들었다. 최상복이 갖다 준 개털 외투를 입은 채 매일 밤 새우잠을 잤다고 하는데,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수사슴에 비유해서 그린 것이다. 수사슴 아래에는 '생명의 꽃'이 그려져 있다.
두 번째 그림과 세 번째 그림은 펜과 붓으로 그렸다. 두 번째 그림은 아내와 두 아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고, 세 번째 그림은 게와 물고기와 아이를 그린 것인데 게가 물고기를 낚으려 하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다음 주에 계속하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