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이중섭, 서귀포 추억 소재로 80여점의 은지화 남겨

   
 
 

서귀포우리집 이중섭作

 
 

"여러 가지 추억을 소재로 한 소품들"
나의 귀여운 가장 멋진 남덕군, 6월 25, 28일자 편지 잘 받았소. 아이들을 데리고 돈을 번다는 것은 힘이 들 것이오. 당신을 도와주는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소.

부산도 통영과 마찬가지로 장마철이라 매일 비가 오고 있소. 편지에는 생각지 않았던 일이 생겨서 걱정이라고 했는데 안심하시오. 조금만 참으면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성실하게 살게 될 것이오. 낙심하지 말고 건강하게 기다려주오. 밤에는 박위주 군과 김영환 형 셋이서 잡니다.

대작을 위한 준비로서 여러 가지 추억을 소재로 한 소품들이 꽤나 많이 완성되었소. 세다가야(世田谷)에서 보여주리다. 그럼 나의 귀여운 나만의 사람이여…계속 편지 보내주시오.
(이중섭이 1953년 7월 아내에게 보낸 편지)

   
 
 

게와가족 이중섭作

 
 

1953년 7월말, 이중섭이 일본을 가다
위 편지를 보내고 난 뒤, 물론 고대해오던 바였지만, 이중섭에게는 급작스럽게 선원증이 발급되었다. 고은의 책에는 구상이 통영 지역구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지삼만에게 부탁하여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선원증이 이중섭에게 발급되었다고 적혀있고, 최석태의 책에는 통영에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던 평양사람의 도움으로 선원증이 발급되었다고 적혀있다.

어떻든 간에 이중섭은 선원증을 입수했고, 이중섭이 탄 배는 1953년 7월말 부산항을 떠나 히로시마 근처 어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선원증이란 것은 여권과는 다른 것이다. 선원증에는 상대국가의 사증(査證)이 없다. 선원 자격으로 입항만 할 수 있을 뿐, 히로시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중섭이 처갓집이 있는 동경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마사꼬가 히로시마로 와서 이중섭을 만났고 (비록 1주일 안에 출국해야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장모가 힘들게 얻어낸 농림대신 히로가와 고우젱(廣川弘禪)의 신원보증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중섭이 히로시마에서 동경으로 간 것은 8월초였다. 이듬해(1954년) 7월말,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도 그런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작년 8월에 히로시마로부터 도쿄로 가서 당신과 태현이와 아고리군(* 이중섭의 별명) 셋이서 꿈과 같은 닷새 동안을 보내고 온 일을 지금 생각하고 있소. (중략) 오늘로써 1년째가 됩니다. 

   
 
 

그림구경 이중섭作

 
 

이중섭이 한국으로 돌아오다
그런데, 동경에 간 이중섭은 처갓집엘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 여관에 묵었다. 월매가 이몽룡을 대하듯, 장모가 사위 이중섭을 서운하게 대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첫째, (지난 39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중섭이 한국에서 마영일로부터 받아가야 할 돈이 있는데 그것을 받아가지고 가질 못했기 때문이다. 이중섭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 아내 마사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나의 살뜰한 사람이여. 나 혼자만의 기차게 어여쁜 남덕군, 그 뒤 어떻게 지냈소. 어머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안부 전해주시오. 나는 덕분에 무사히 부산으로 돌아왔소. 이번에 동경에서 당신과 함께 보낸 6일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버려서 정말 꿈을 꾸고 온 것만 같소. (중략) 돈 문제는 곧 알아보고 2, 3일 후에 알리겠소. 걱정 말고 기운을 내어 길고 긴 편지를 고대하오.

둘째, 어느 장모나 다 마찬가지지만, 이중섭의 장모는 사위 이중섭이 경제적으로 무능하여 딸 마사꼬를 고생시킨 것을 몹시 불만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중섭이 1953년 9월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7월말 도쿄에 갔을 때는 갑작스런 걸음이어서 한 푼도 못가지고 갔기에 여러 가지로 당신의 입장을 괴롭게 한 것은 주인으로서, 아빠로서, 화공(畵工)으로서 송구할 뿐이오. 마음 아프게 생각할 따름이오.

하지만 그대들을 만나 여러 가지 사정도 알고 분명한 현실적인 각오도 새롭게 하였소. 정신을 가다듬고 최선을 다하려는 각오로 이제부터는 정말 악착같이 노력할 테니 걱정 마오. 대향의 진정과 변하지 않는 애정만을 믿고 참고 기다려주기 바라오.

이렇듯 이중섭이 동경에 가서도 처갓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장모에게 푸대접을 받고 온 것에 대해 마사꼬는 1998년 「월간 아리랑」지와의 인터뷰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명했다.

만일 체류기한을 넘겨서 불법체류가 되면 신원보증인의 입장이 곤란해질 뿐만 아니라 밀입국자로 구속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중섭이 장차 일본에서 화가로 활동하는 데에 지장을 줄 것이라며 장모가 사위에게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된 여권을 만들어가지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딸과의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주겠다고 했다 한다.

이중섭은 80여점의 은지화(銀紙畵)와 1943년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태양상을 받을 때 부상으로 받은 팔레트 한 점, 그리고 평소 몸에 지니고 다니던 손바닥만한 길이의 불상을 마사꼬에게 맡기고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귀포의 추억을 소재로 한 소품들
위 그림들은 당시 이중섭이 아내에게 맡기고 온 80여점의 은지화들 중 일부로서 서귀포의 추억을 소재로 한 소품들이다. 아내에게 "대작을 위한 밑그림이니 아무에게도 보이지 말라"고 한 그림이기도 하다.

1952년 봄, 아내와 두 어린 아들이 부산에서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간 뒤에 그린 것. 양담뱃갑 속에 든 은지(銀紙)를 꺼내어 그 위를 주머니칼 중에 있는 '송곳'으로 선각(線刻)한 뒤 번트엄버를 도포하고 헝겊으로 문질러 닦아냄으로써 패인 곳에 남은 유화물감이 선묘(線描)의 강한 느낌을 부각시키는 그림이다.

재료적 측면에서 은지화(銀紙畵)라고들 부른다. '종이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해서 담배 은박지를 주워 거기에다 그림을 그린 것'이라들 말하는데 이는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오른쪽 두 그림은 이중섭 가족이 바닷가에서 게와 물고기를 잡으며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위 그림에는 문섬과 섬섬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위 그림은 두 아이가 바닷가에 있는 것을 그린 것이다. 한 아이가 실로 게를 묶어 손에 쥐고 있다. 여기서 게는 예술을 상징한 것이고, 실은 커뮤니케이션을 상징한 것이며, 아이는 이중섭 자신을 그린 것이다. (※ 자세한 해설은 나중에 '파란 게와 어린이'를 해설할 때 하기로 한다.)

실이 다른 곳으로 계속 연결되어 나가지 못하고 아이의 손에서 끝나고 마는 것은 단절을 의미한다. 아이의 모습이 무척이나 고독해 보인다.

가운데 아래 그림은 그림을 그리는 이중섭 자신을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서귀포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서 구경하는 것을 그린 것이다. 현실의 아이가 그림 속 아이와 장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왼쪽 그림은 '서귀포 우리집'이란 명제가 붙어있는 그림이다.

아이들이 박처럼 지붕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당시 육지에서 피난 와 송태주네 고방에 세 들어 사는 화가 이중섭네 가족을 이상한 나라에서 온 사람 구경하듯 돌담 밖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서귀포 아이들의 모습이 화면 맨 아래에 그려져 있다.

이중섭이 살던 고방 동쪽으로 난 문이 지금 복원된 것과는 달리 '외여닫이문'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본 연재 31, 32회에 소개한 조관형 화가의 그림과 정확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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