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길 떠나는 가족」 일본에서 가족과 사는 모습 미리 그려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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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떠나는 가족」 29.5㎝×64.5㎝. 종이에 유채. 1954 | |
「길 떠나는 가족」 원화는 지금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서귀포로 향한 이중섭 일가의 이주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이중섭미술관 전시도록에 적혀있는데, 이는 잘못된 해설이다.
왜냐면 이 그림을 그리던 1954년 당시, 이중섭은 가족이 있는 일본에 가려고 했지 서귀포에 오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중섭 가족이 서귀포로 피난 오던 1950~51년의 상황을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렇다. 원산에서 부산까지 올 때는 배를 탔고, 부산에서 제주까지 올 때도 배를 탔으며, 제주에서 서귀포까지 올 때는 트럭을 탔지, 이렇게 소달구지를 탄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무엇을 내용으로 한 것일까?
「달과 까마귀」 그리고 서울 누상동 집
1954년 6월 25일, 제5회 대한미협전이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렸다. 권위 있는 이 전람회에 모두들 50호 내지 100호 크기의 진지한 듯한 대작들을 출품했지만, 이중섭이 내놓은 그림은 겨우 10호짜리 석 점이었다. 그 전 해(1953년) 부산에서 열렸던 제4회 대한미협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중섭은 은지화 9×15cm 1점과 조각 1점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 조각이란 다름 아닌 '담배 파이프'에 조각을 새긴 것이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그렇게 작은 작품을 출품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1938년 동경 문화학원 재학시절에도 권위 있는 자유미술가협회전에 겨우 연필소묘 몇 점을 출품하지 않았던가. 고은(高銀)은 이를 가리켜 폐허예술이 아닌 반동으로서의 '오만한 장난'이라고 했다.
어떻든 이중섭이 제5회 대한미협전(1954년 6월 25일)에 출품한 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달과 까마귀」였다. 「달과 까마귀」는 전시 첫날 친구 김종문(시인·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이 매약(買約)했다. 미국 공보원장이며 미대사관의 문정관인 슈바커가 김종문에게 500달러를 줄 테니 양보하라고 했지만 김종문이 거절하는 바람에 슈바커는 다른 작품을 살 수밖에 없었다. 7월 5일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다.
"이번에 낸 작품 평판이 아주 좋으니까 서울에서의 소품전도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친구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하루빨리 소품전 제작을 시작하라고 권해줍디다. 일주일 후에는 친구가 방 한 칸을 빌려준대요. 쌀값도 당해 준다는 얘깁니다."
그 친구는 정치열이었다. 원산 친구였는데 사업상 부산에 남아있었고, 그의 서울 집(누상동 166-10. 2층 8조 다다미방)을 이중섭에게 빌려준 것이다. 7월 13일에 이사 간 이 집은 밝고 조용해서 그림을 그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중섭은 이 집에서 소품전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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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태현에게 보낸 그림 편지 | |
일본에 가려던 이유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8월 12일자 편지에는 "하루빨리 만나고 싶어 못 견디겠소. 아빠도 팬티까지 벗어던지고 일에 열중하고 있소."라는 구절이 적혀있다.
또 9월 추석 무렵에 쓴 편지에는 "책방의 돈 문제는 아고리(*이중섭의 별명)가 떠날 때는 완전히 해결이 될 테니 염려 마시오." "나의 상냥한 사람이여 한가위 달을 혼자 쳐다보며 당신들을 가슴 하나 가득 품고 있소."라는 구절이 적혀있다. |
9월말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 가는 방법이 적혀있다. 일본의 모던아트협회가 한국의 화가 이중섭을 미술시찰 및 연구를 위한 회원으로서 초청하는 방식인데, 일본 외부부가 입국허가서와 초청장을 보내오고 한국 외무부가 허가하면 만사는 해결된다고 적혀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싶어서 일본 가려고 한 것이 뭐가 잘못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중섭이 일본에 가려고 했는지를 또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동포가 조국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저 혼자 잘 살려고 일본으로 도망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에, 이중섭의 9월말 편지를 여기에 좀 더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지금 그저 마음에 있는 올바른 일, 아름다운 일, 새로운 표현을 그대들 곁에서 마음껏 제작하고 싶은 욕망과 열망뿐이오. 한국에서도 제작은 할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참고와 재료, 그밖에 외국의 작품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보다 새로운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오.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세계 속에 올바르게,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으로 자처하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조국을 떠나는 것은…더욱이 조국의 여러분이 즐기고 기뻐해줄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여 다른 나라의 어떠한 화공에게도 뒤지지 않는 올바르고 아름다운, 참으로 새로운 표현을 하기 위하여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소. 세계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최악의 조건하에서 생활해온 표현, 올바른 방향의 외침을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은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개인전에 이중섭은 소품 45점을 출품했다. 당시의 전시도록 2면과 3면에는 작품목록이 나와 있다. 1번부터 45번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길 떠나는 가족」은 44번째 작품이었다.
이중섭은 이 「길 떠나는 가족」을 그릴 당시 이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한 장 더 그려 아들 태현에게 보냈다. 그림 밑에 일본어로 적은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태현에게. 나의 태현아 건강하겠지. 너의 친구들도 모두 건강하고. 아빠도 건강하다. 아빠는 전람회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 황소 위에는 구름이다. 그만 몸 성해라. 아빠 중섭"
「길 떠나는 가족」은 이중섭이 일본에 가서 가족과 함께 사는 모습을 미리 그려본 것이다. 그런데 웬 소달구지가 등장하고 한복을 입은 이중섭 부부가 등장했을까? 필자는 이 연재 초반부터 이중섭 그림의 특징은 '상징'과 '왜곡'과 '변형'이라고 강조해왔다. 여기에 나오는 '소달구지'와 '한복'은 물론이고, '꽃'과 '비둘기'와 '구름'까지도 상징적인 의미로 읽어주어야 한다. '따뜻한 남쪽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서귀포를 지칭한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길 떠나는 가족」은 이중섭이 일본에 가서도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구상은 당시 이중섭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 보고 겪은 그대로 이 고장의 피나는 소재를 가지고 말이야 동경 가서 그려올게. 마음껏 큰 캔버스에다 채색을 한번 바르고 문질러서 그림다운 그림을 그려올게. 남덕이 보고 싶어 가는 줄 오해 말어. 방 하나 따로 구해노라고 편지했어. 구상 알았음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