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딛는 잠녀의 삶-제주시 구좌읍 우도어촌계 上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저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배움 없는 우리 해녀…/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해녀 항일가 중>
올 들어 '우도'와 '잠녀'는 뗄레야 뗄 수 없을 만큼 각별한 단어 조합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 중에는 잇딴 잠녀 사망 사고 같은 슬픈 기록이 있지만, 또 잊혀져 가는 잠녀를 기억하는 새로운 자료가 있다.
△잠녀상, '해녀 항일가' 그리고…
지난달 전국 최대 규모의 여성 항일운동으로 꼽히는 제주 해녀 항일운동 당시 불렸던 '해녀 항일가'가 CD로 제작됐다.
제주특별자치도해녀박물관이 제작한 '제주 해녀의 노래'CD에는 1931년 가을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일제의 수탈조직으로 전락한 제주도해녀어업조합에 항거, 구좌읍 우도면과 성산읍 일대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이뤄진 해녀 항일운동 현장에서 불려진 해녀 항일가 등이 수록됐다.
잠녀 취재를 위해 우도에 들어갔을 때 역시 해녀항일가를 기억하고 있는 고태연 할머니(87)를 만났다.
'이제는 발음이 부정확해 못 부른다'고 몇 번이고 손사래를 치던 고 할머니는 4절까지 완벽하게 기억해냈다. 고 할머니는 "힘들 때면 저절로 흥얼거려진다"며 "얼마나 불렀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고 할머니는 "지금 사람들은 그냥 듣는 거지만 잠녀들에게 이 노래는 당시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더 뜻깊다"며 "나이를 먹었지만 그래서 더 잊혀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해녀 항일가는 사회주의 이념 하에 민족해방을 목표로 활동하던 제주지역의 비밀결사인 '혁우동맹'의 일원인 우도 출신의 해녀인 강관순(1909∼1942)씨가 1933년 치안유 지법 위반으로 검거돼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던 중 지은 총 4절의 노래다.
우도에는 또 지난 6월 세계 최대의 잠녀상도 세워졌다.
'잠녀의 고향'이라 불리는 우도면 오봉리 하고수동 해수욕장에 세워진 이 잠녀상은 높이가 3m, 무게는 3.5t에 이른다.
이 잠녀상은 한해 방문객만 5만명이 넘는 이곳 우도의 명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도 마을의 액을 막고 험하고 힘든 바다 작업을 하는 잠녀들의 무사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섬 속의 섬, 몸에 배인 억척스런 생활력
우도 잠녀들은 다른 잠녀들에 비해 강인한 체질과 억척스런 생활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다고 했다.
해녀 항일 운동 당시 300여명이 넘는 잠녀들이 참여했다.
섬 속의 섬 우도의 돌과 바람은 그녀들을 저절로 억세게 만들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반농반어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농업보다는 어업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가정 경제면에서는 잠녀들의 물질에 많이 의존했다.
전복과 오분자기, 소라, 넙미역, 우뭇가사리 등 풍부한 해산물은 잠녀들에게 큰 위안이 됐지만 지금은 옛 명성을 따라잡기에 한없이 부족하다.
우도의 총 세대수는 725세대로 총인구 1718명이다. 이중 여성이 885명, 남성이 833명이다. 여성 중 343명이 잠녀다. 인구비례로 따지면 잠녀 비중이 많지만 이중 70대 이상이 41.4%나 되는 등 나이를 먹었다.
이곳 잠녀들은 자연부락별로 물질 작업을 한다. 법정리로는 4개로 나뉘지만 그 안에 2~4개 자연부락이 있다.
잠녀수가 가장 많은 오봉리(121명)는 주흥동과 전흥공, 상·하고수동이 있고, 102명의 잠녀가 소속된 조일리는 비양동과 영일동으로 구성된다. 천진동(77명)과 서광리(43명)는 각각 동·서 천진동과 상·하우목동, 중앙동으로 자연부락이 나뉘어있다.
'어느 바다가 좋은가'를 묻는 것은 실례다. 우도섬 전체가 잠녀 어장이고 제주시수엽 역시 우도 어장을 하나로 본다. 예전에는 각 동별로 수매를 돕는 '상고'를 지정한 뒤 어촌계가 해산물을 한꺼번에 수집, 판매하며 잠녀들을 관리했다,
'발로 딛는 잠녀들의 삶' 다음 이야기는 제주시 우도 어촌계 하이며, 관련 내용은 해녀박물관 홈페이지(www.haenyeo.go.kr)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