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가 그려진 소」

 
 

   
 
 

「두 마리 사슴」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바다가 보이는 풍경」

 
 

   
 
 

「부부」

 
 

   
 
 

「달과 까마귀」

 
 

① 「물고기가 그려진 소」는 이중섭이 1951년 서귀포 피난시절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중섭이 1940년 일본유학시절에 그린 것이라고 했다. 황소가 뿔로 물고기를 떠받은 뒤 불알을 보여주며 '엿 먹어라!'고 욕하는 그림이라고 했다. 물고기는 제국주의자를 상징한다고 했다. (※ 본 연재 제3회 참조)

② 이중섭이 1940년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던 「작품」은 황소가 뒷발을 핥는 그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황소가 뒷다리를 쳐들어 불알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라고 했다. 「물고기가 그려진 소」는 이 「작품」의 습작이라고 했다. (※ 제3회 참조)

③ 이중섭이 1941년 엽서에 그려 마사꼬에게 보낸 「두 마리 사슴」은 화면 바깥에 어떤 위협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능청스런 수사슴이 귀여운 암사슴을 만져보고 싶어서 마치 화면 바깥에 어떤 위협이 있어서 자신이 암사슴을 보호해야만 되는 것처럼 제스처를 쓴 것뿐이라고 했다.

이 그림에 등장한 수사슴의 앞다리가 사람의 팔처럼 그려진 것은 잘못 그려진 것이 아니라 '왜곡'이라고 하는 이중섭의 특징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 제5회 참조)

④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슴」은 위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그려진 동물은 산양의 뿔과 염소의 수염과 낙타의 목을 가진 동물이라고 하면서 「두 마리 사슴」에 그려진 수사슴의 앞다리와 마찬가지로 왜곡 표현된 점이 이중섭 진품임을 입증한다고 했다. (※ 제6회 참조)

⑤ 이중섭이 부산 피난시절에 그린 「사계」 중 '봄'에 해당하는 부분은 아이가 커다란 연잎을 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연꽃 같은 아이'를 그린 것이라고 했다. 아이를 연꽃에 비유하기 위해서 연잎을 작게 그린 것이지 아마존 정글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연잎을 그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아이가 연잎을 들고 있는 형상이 아니라 연잎 위에 얹혀져있는 형상이라고 했다. (※ 제9회 참조)

⑥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연과 아이」는 위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그림을 「사계」 중 '봄'의 습작이라고 했다. '봄'의 형상과 똑같이 그리려고 한 위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이중섭 진품이 틀림없다고 했다. (※ 제9, 10, 11회 참조)

⑦ 「소년」은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그림이 해방 후에 그려진 것이라고 했다. 또 이 그림에서 세로로 그어진 선은 연필로 구사한 부벽준(斧劈)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시련의 상징으로서 빗줄기를 그려 넣은 것이지 측필 기법인 부벽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했다. (※ 제11회 참조)

⑧ 이중섭이 1941년 엽서에 그려 마사꼬에게 보낸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면서도 짐짓 모른 체 하고 있는 남자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결혼한다는 것이 윤리에 어긋난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 어느 외딴섬에서 이중섭 자신은 나무가 되고 마사꼬는 돌이 되어 영원히 함께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 제13, 30회 참조)

⑨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이중섭이 1951년 서귀포에 피난 왔을 때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평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 오광수 저 「이중섭」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나무만 뚜렷하게 묘사되었을 뿐 초가와 기와집은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숲 사이로 내다보이는 푸른 바다가 그나마 바닷가 풍경임을 알려줄 뿐이다. 이중섭의 체취를 느끼기에 미흡하다. 싸인이 되어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단순한 스케치 수준이며 이중섭 자신도 본격적인 작품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그림이야 말로 이중섭의 체취가 듬뿍 묻어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중섭 자신이 그 10년 전(1941년)에 그린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를 패러디한 것으로서 이번에는 마사꼬까지도 나무로 변한 것처럼 그린 것이라고 했다. 나무가 주제이기 때문에 나무를 강조한 것이고 나머지는 일부러 약화한 것이라고 했다. (※ 12, 13, 30회 참조)

⑩ 이중섭이 1940년에 그린 「망월」에서는 조선인이 맞닥뜨린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봇물 터지듯이 터진 이중섭과 마사꼬의 성애(性愛) 외에는 다른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 제14회 참조)

⑪ 이중섭이 1941년에 그린 「연못이 있는 풍경」은 소를 돌보며 사는 늙은 뒤의 이중섭 자신을 미리 그려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조선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마사꼬를 마사꼬의 아버지가 나무라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 제14, 15회 참조)

⑫ 이중섭이 1943년에 그려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여 최고상인 태양상을 수상한 「망월」은 일제 강점기 하에 있는 조국의 비운과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었다(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 참조).

또 이 그림에서 소년이 한 손을 머리 위로 쳐든 것은 조선의 전통 춤사위라고 알려져 있었다(「이중섭 평전」참조). 그러나 필자는 마사꼬의 아버지가 이중섭에게 졌다고 항복을 표시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 제15회 참조)

⑬ 이중섭의 유토피아 의식이 최초로 구현된 작품이1954년 작 「길 떠나는 가족」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1940년 작 「망월」과 1941년 작 「망월」그리고 「토끼풀 꽃이 있는 바닷가」에서도 이중섭의 유토피아 의식은 이미 구현되어있었다고 했다. (※ 제16, 17회 참조)

⑭ 이중섭 작 「세 사람」은 해방 전에 그려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 일제강점기의 실상을 잘 말해주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소년」과 마찬가지로 해방 후에 그려진 것이라고 했다. 북한 공산치하에서 형 이중석이 처형되자 그 슬픔과 고통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했다. (※ 제21회 참조)

⑮ 이중섭은 그의 첫째 아들이 죽었을 때 친구 구상과 술집에 가서 작부의 유방을 한번씩 만지는 것으로 술안주를 삼고 집에 돌아와 벌거벗은 아내를 가운데 두고 셋이서 나란히 잠을 잤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이중섭이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영적인 매개자 샤먼이 행위 하는 것처럼,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죽은 아들과의 영적 대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천도(天桃)와 아이들을 그려 아들의 관 속에 넣어준 것은 진정한 퍼포먼스이며 미술관에서 하는 실내 전시와는 차원이 다른 미술이라고 했다. (※ 제21회 참조)

16 「다섯 아이와 끈」, 「가족」 등에 그려진 끈은 아이들을 서로 연결하기 위한 것, 다시 말해 공동체 의식을 나타낸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천사를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 제22, 45회 참조)

17 북한 당국은 이중섭의 투계도(鬪鷄圖)를 보고 처음에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그린 것이라며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중섭의 투계도가 전부 원형구도(圓形構圖)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실은 화합(和合)을 나타낸 것이었다고 밝혀냈다. (※ 제23회 참조)

18 이중섭이 1954년 6월 25일 대한미술협회전에 출품한 「달과 까마귀」의 주제는 지금까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이중섭이 북한에서 그린 까마귀 그림들을 패러디한 것으로서 '달용이'와 같은 사회적으로 못된 놈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 제24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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