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한 잘못된 해석·시각 다반사… 편향된 접근 옳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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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섶섬이 보이는 풍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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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 쏘는 남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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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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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떠나는 가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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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의 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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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게와 어린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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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와 아이」 | ||
19서귀포시는 이중섭이 1951년에 피난 와서 거주했던 집을 1997년에 복원 공개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이중섭 거주지 복원이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가옥의 너비를 2m가량 더 늘여 예전에 없던 새로운 방을 하나 더 만들어놓고는 이중섭 가족이 살았던 방이라고 허위 공개하고 있다고 했다. (※ 본 연재 제27, 30, 31, 32, 37, 40회 참조)
20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오광수는 평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 그림이 이중섭의 체취를 느끼기에 미흡하고, 단순한 스케치 수준이며, 이중섭 자신도 본격적인 작품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4·3 때 학살 현장이었던 서귀포 '소남머리'를 주제로 하여 그린 것으로서 이중섭의 진정한 대표작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 제29회 참조)
21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서귀포의 환상」에 대해 최석태는 화면 위쪽은 환상에 해당하며 아래쪽은 현실에 해당한다고 했다. 또 오광수는 구성의 밀도가 떨어지는 서술적 설정이라고 하면서 노란색이나 바다의 물빛 때문에 꿈꾸는 듯한 몽롱한 분위기를 나타낸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영혼불멸의 원초적 생명을 나타낸 주화(呪畵)라고 했다. 화면에 그려진 새들은 4·3 때 죽은 제주인들의 영혼을 상징 표현한 것이고 아이들은 죽은 이들의 육신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죽은 이들의 영혼을 이곳 서귀포로 불러들여 육신과의 결합을 시도한 그림이라고 하면서 이중섭의 진정한 대표작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 제34, 35회 참조)
22주간 「문학예술」제5호에 실린 김이석의 단편소설 「휴가」의 삽화는 이중섭이 그린 것인데 주제가 무엇인지는 지금까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당시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이해관계가 빚어낸 로컬 전쟁이 아니라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 미국과 소련이 빚어낸 '준비된 전쟁'이었다고 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속임수를 쓴 미국을 이중섭이 '뺑뺑이 꾼'에 비유해서 그린 것이라고 했다. (※ 제38회 참조)
23주간 「문학예술」에 게재된 이중섭의 삽화 쪼그린 수사슴은 춥고 배고픈 이중섭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중섭은 사슴 아래에 생명의 꽃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역경에 굴하지 않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필자는 해석했다. (※ 제39회 참조)
24이중섭이 1953년 일본에 가서 아내에게 맡기고 온 80여점의 은지화들 중에는 바닷가의 두 아이를 그린 그림이 있다. 게를 묶은 실이 뒷짐을 진 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데, 여기서 아이는 이중섭 자신을 그린 것이고, 게는 예술을 상징한 것이며, 실은 커뮤니케이션을 상징한 것이라고 필자는 해석했다. (※ 제40회 참조)
25「부부」는 두 마리의 새가 서로 만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서로 만날 수 없는 부부를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수탉이 공중에 튀어오를 정도로 정력이 넘쳐나고 거기에 호응하는 암탉도 다리에 맥이 풀릴 정도로 행복에 젖어있으며 부리로서만 키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혀까지 사용하여 키스하고 있다면서 아내를 만나려고 하는 이중섭 자신의 의지를 나타난 그림이라고 해석했다. (※ 제41회 참조)
26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매화」는 위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중섭이 1953년 9월 아내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소개하면서 절개와 지조의 상징인 매화에다 아내를 비유할 만도 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매화」를 인쇄용 원고라고 하면서 교정용 세필과 먹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 'ㅈㅜㅇㅅㅓㅂ' 사인도 세필을 눕혀서 쓴 것이므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진품이라고 했다. (※ 제42회 참조)
27'해후 57' 展에 나온 「활 쏘는 남자」는 새를 잡으려고 활을 쏘고 있는 남자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중섭이 감상자로 하여금 그림 속 여자의 눈을 통하여 벌거벗은 남자의 앞모습을 상상하게끔 유도한 그림이라고 했다. (※ 제44회 참조)
28'해후 57' 展에 나온 「파란 게와 어린이」는 낚싯줄에 게를 매단 한 아이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쪽 손을 번쩍 쳐들고 있는 이 아이는 게를 잡고 흥분에 겨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 아이 뒤에 선으로 그어진 것은 제주도 돌담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돌담이 아니라 새장이라고 했다.
새장 속에 갇힌 이중섭 자신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새장 속에서 바깥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구원해 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새장 바깥의 파란 강물은 자유를 상징하며, 새장 안의 게는 예술을 상징한다고 했다. 게의 색깔을 강물의 파란 색깔에다 일치시킴으로써 자신의 예술이 자유를 희구하는 것임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낚싯줄이 화면 바깥으로 나간 것은 자신의 예술이 바깥세상과 소통되기를 기원한 것이라고 했다. 아이의 얼굴을 거꾸로 그린 것은 감상자로 하여금 아이의 눈을 통해 잘못된 세상을 거꾸로, 즉 바로 보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 제44회 참조)
29'해후 57' 展에 나온 「가족」은 구도가 완벽하고 색채의 조화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구도가 답답하고, 색채는 조화가 아니라 대조를 이룬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중섭 그림을 그런 시각적 방식으로 해설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필자는 이중섭 그림이 이미 현대회화에 들어와 있었다고 하면서 현대회화를 보는 감상자는 화가가 제시한 그림을 매개체로 삼아 자신의 속 안에다 자신이 좋아하는 식으로 자신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 제45회 참조)
30필자는 이중섭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흰 소」와 「황소」에서 소의 골격과 주름이 강조된 것은 강력한 힘을 불어넣으려는 주화(呪畵) 양식이라고 했다. 또 「황소」에서 붉은색으로 칠해진 배경은 마음을 나타내는 상징색이라고 했다. (※ 제46회 참조)
31'해후 57' 展에 나온 「길 떠나는 가족」은 서귀포로 향한 이중섭 일가의 이주를 내용으로 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중섭이 나중에 일본에 가서 가족을 만나게 되면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그림이라고 했다. (※ 제47회 참조)
32'해후 57' 展에 나온 「소와 아이」는 소가 쉬려고 막 누우려는 순간 아이가 소의 뒷다리 사이로 들어가 같이 놀자고 장난을 걸고 있는 목가적인 그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지게를 지겟다리로 받치듯이 쓰러지려는 소를 이중섭이 등으로 받치고 있는 신화적인 그림이라고 했다. (※ 제48회 참조)
2주 연속 게재한 에필로그 1, 2는 이중섭 그림에 대한 필자 고유의 해설을 핵심 요약한 것입니다. 필자는 타인의 저작물을 부분 인용하기는 했으나, 필자의 핵심 해설로서 도용 또는 모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중섭미술관 세 작품을 위작논란에서 구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분량의 글을 매주 게재할 수 있게 지면을 허락해 주신 제주도민의 자존심 제민일보사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그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