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이름으로'를 빙자해 제 잇속 챙기기 바쁜 현실태 바꿔야

실제 영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만든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삶에 무게에 짓눌려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지 못한 주인공이 진실이 억눌려 버린 감옥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던 아버지의 참 모습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진실을 밝혀내려는 아버지의 부정이 잘 녹아 있는 영화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삶에 대한 진실과 사랑,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과 용기를 가지고 당당하게 삶을 헤쳐 나가야 하고, 결국 진실된 삶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걸핏하면 누구누구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종종하게 된다. 특히 정치꾼들은 더욱 그렇다.
그들은 의사표현을 관철시키거나 혹은 그들의 잘못된 점을 숨기기 위해서 그런 표현을 서슴치 않는다. 현 정부나 지난 정부의 잘잘못을 '국민의 이름으로 심판 하겠다' '도민의 이름을 걸고 결코 그런 결정은 하지 않겠다'  등등 허울 좋은 이름을 남발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때론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는 이름도 있다. 바로 '조국의 이름으로' 영광을 대신하는 이름이다. 남극의 오지에서,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올림픽 경기에서, 뜨거운 사막의 열기 속에서도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평생 신문이나 방송에 이름한번 나오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조국의 이름으로' 오늘도 삶을 사랑하고 국가를 위해, 가정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국민의 이름으로란 이름은 누가 어떨 때 쓰는가라는 질문은 국민이란 이름을 빙자한 자들의 위세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고 싶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촛불시위와 독도문제, 금강산 사건, 원양어선 피랍사건 등 어지러운 사회를 보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국민의 이름으로'를 남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방송과 언론이 촛불시위자를 '국민'이라 미화하여 불러준다면, 한 젊은 청년이 반대편에서 외로이 촟불반대 피킷을 들고 서 있다면 촛불반대자는 이미 '국민'이 아니라는 이율배반적인 논리에 접하게 된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말할 수 있고 자기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촛불시위대가 바로 이 국가가 부여한 자유에 의해 거리에 나가서 구호를 외칠 수 있다면 다른 국민들도 반대의 구호를 외칠 수 있어야 똑같은 국민이 되는 것이다.

국민이란 평등한 존재다. 헌법과 법은 국가와 공권력 앞에 국민들이 동일한 권리와 의무, 최소한의 평등권을 가질 것을 담보한다.

그러나 촟불시위대가 됐건 반대시위자가 됐건, 국민의 처절한 절규를 뒤로한 채 정치인들이라는 사람들은 꿋꿋하게 자신들의 철밥통을 챙기기 위해 적당히 싸우고 서로 비난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교묘히 단합을 한다.

국민의 세금을 축내면서 항상 '국민의 이름으로' '도민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빌미로 민생보다 그들의 묘비명에 이름 한줄 더 올리려고 사사로운 이익을 먼저 챙기는 일이 이 나라 정치의 현주소인 것이다. 진정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아닌가 싶다. 민생과, 진실과, 정의를 위해 그들의 이름으로 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자.
고물가 고환율 고유가의 어려운 경제환경이 지금 우리에게 놓여있다. 시장보기가 겁나고 차를 끌고 나오기가 힘에 버겁고, 정당은 물론 사회단체마다 편가르기에 국민들은 쉬 지쳐버렸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다. 오늘날 총체적 이 난국을 슬기롭게 타개할 우리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누가 과연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시대의 진실된 삶과 용기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 

김장범 도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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