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화가 이왈종

 그 순간, 그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결단했다. 멀어서 자신을 묶어놓을 수 있는 정신적 유배지, 자신의 미래를 붓칠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 제주도였다. 결국 그의 화면은 그 섬의 밝고 따스한 색조로 가득 찬다. 한폭의 시처럼. 소리가 들린다. 둥글고 키큰 나무에서 쏟아지는 꽃비, 그 꽃나무 안쪽에 정좌한 빈둥거림, 그 바깥쪽의 삶의 풍경들. 까르르 유영하는 새들의 환희,  요염한 웃음소리. 또 있다. 크게 삿대질하는 여인의 세 개의 팔뚝 앞에서 뭘 잘못했는지 발발 기어들어가는 남자의 목소리. 죽어서 천당하고 서귀포 중 어디를 택하겠냐 물어봐라. 서귀포라 답하리라는 사람. '서귀포 왈종'. 독특한 한국적 미감으로 국내외서 확고한 인기를 누리는 우리시대의 화가 이왈종. 그의 화면은 늘 새로운 도전이다. '생활속의 중도', 그 치열한 작가정신을 마주했다.

   
 
 

 화가 이왈종은

 1945년 경기도 화성 출생. 중앙대 회화과·건국대 교육대학원 졸업. 16회의 개인전, 아시아 현대 미술제(1975·1982), 한국의 자연전(1979, 국립현대미술관), 국제 수묵화 명가 정선전(1988, 베이징), 한국미술 오늘의 상황전(1990, 예술의 전당), 서울 현대한국화전(1991,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국제현대미술제(1994,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국전 문화공보부장관상, 미술기자상, 한국미술작가상, 제5회 월전미술상, 국립현대미술관의 현대미술작가에 연속 초대되었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등 역임. 추계예술대 교수(1979~1990). 저서로 「생활속에서- 중도의 세계 이왈종의 회화」 등. 1991년부터 서귀포에서 작품 생활.

 
 
# 작가란 철저하게 자기 세계 가야

"인기라는 것은 아침이슬과 같다 했잖아요. 견고하게 하는 것은 자기 몸을 태우는 방법밖에 없죠. 작가는 철저하게 자기 세계를 가야하는 거죠. 작가는 적당히라는게 없죠."

화가 이왈종. 지난 11월, 그는 서울 현대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3년만에. 불황속에서도 그에 대한 반응은 여전히 뜨거웠다. 두 번째 묵직한 화집도 냈다. 그는 아크릴화, 목조, 도조의 세계를 넘나든다. "평면만 하니까 지루해서, 심심하니까. 통나무(송판)를 쪄가지고 말려 싣고 와서 부조하나를 뜨고 도자기를 하는 거죠. 전통 한국화는 화선지라는 종이가 너무 얇죠. 그게 문제가 많아요. 잘 찢어지고. 그래서 인간문화재한테 맞춰서 장지를 10합으로 해서 쓰는데 다라니경이 1300년 간다하잖아요. 그 종이예요."

그의 화실은 밝고 화사한 입체적 꽃그림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다양한 기법을 동원한다. 모시에 염색한 보자기작업에서 최근엔 돌작업까지. "톱질해야지, 끌가지고 망치질해야지, 또 철사를 구부려가지고 만든 거예요. 게으르게 살다보면 게으름 속에서 새로운 것이 보이죠." 독창적인 것이 생명이란 사람. 그의 상상력은 가까운데 있다. 그의 정원, 그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소한 것들에서. 그 상상속에는 리얼리티가 담겨있다. "인간이 새도 되고, 새가 인간도 되고 꽃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내 그림은 물질과 만나면 인연따라 변화될 수 있다는 가상을 그린 것이다."

바다로 향한 그의 마당엔 붉은동백, 흰동백이 자란다. 그 사이로 새들이 노닌다. 그 곳의 생명들과 공존하며 그는 새를 위한 맞춤형 정원을 가꾼다. 새가 좋아하는 열매, 꽃나무를 바꿔주는 배려도 한다. 그는 분주하게 어디를 다니면서 스케치하지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 그릴 뿐. 단순하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행복감을 느낀다한다.

# '서귀포 왈종' 20여년…극락속에 사는 삶

그는 '서귀포 왈종'이라 사인한다. 이미 그는 1991년부터 4년반 연재하던 중앙지 삽화를 그리면서 그렇게 썼다. 가족이고 뭐고 팽개치고 5년만 살다 죽으리라 내려온 서귀포, 스스로 '바다만으로도/ 모든 생이 보이고/ 뱃길만으로도 가야할 길이 보인다'는 그곳 생활 19년. 제주도 살면 제주도 사람이라는 이왈종. 그는 왜 구태여 이 섬이었을까?

가장 안정적인 교수직을 버리기 힘든 나이였고, 이 때가 지나면 다시는 버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40대 중반. 밝은 형광등 아래서의 작업으로 그의 눈에 혈관확장증이 찾아왔다. 고통스러웠다. 안개속의 미로를 걷는 심정. 그때 이미 그는 상복도 많았던 유명 인기 작가였다. 그런데도 온전히 그림에 바치지 않는 자신에게 '이것이 무슨 작가냐' 강렬한 회의가 밀려왔다.

대학에서 안식년을 신청, 1년동안 작품하러 제주도를 왔다갔다했다. "학교를 가야할 이유가 없더라구요. 꽃이 겨울에도 있는 곳. 꽃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면 그것이 극락 아니냐. 꽃을 그리는 이유도 꽃이라는 이미지만 가지고도 성공할 수 있다해서 온 거예요. 꽃 있지, 새있지, 반딧불 있지, 귀뚜라미가 교향곡 들려주지, 그러니까 극락속에 사는 거죠. 사람 만날 이유도 없어요."

그때 '반야심경'이 가슴을 쳤다. 대단한 미학의 발견이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이란 것은 보이는 현상계, 물질, 이런것. 자연,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은 색이라고 그래요. 색은 공으로 가고 또 공은 공속에 새로운 형체가 생기는 거예요. 현상계를 다 해체시키고, 조형하는 거예요. 예술자체가 오감에 의해서 작용하는 거잖아요." 그는 원래 유교지만 불교적인 성향이 짙다. 허허롭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교의 12연기법. 인연따라 사는 것이라는 그는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는, 자연의 이치대로 사는 삶에 기댄다.  

# 화판 위 파리 한 마리의 비상에 위안

그의 첫번째 처소는 서귀포시 남원. 그때가 메밀꽃 필 무렵. 잔설이 내린 것처럼 보이고 달은 휘영청 밝고, 억새는 휘날리는데 화가는 집과 반대방향으로 남쪽으로만 가고 있었다. "그 충격이 가슴을 설레게해요.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단지 모든 걸 올인 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갔어요. 산속의 신도들은 신도도 오지만 나는 신도도 없고 이게 뭐냐했어요. 그때 화판으로 파리 한 마리가 비상하는 것이 그렇게 위안이 되더라구요." 살아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반지하실에서. 비장한 마음으로, 열다섯시간 작업했다.

"이 세상은 적당히 되는 것 하나도 없어요. 보낸 것 만큼 오고. 노력말고 방법이 없는 거에요. 공부라는게 뻔해요. 하나 안하나죠." 그래도 그때 제주를 선택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밥먹고 사는 것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세요. 작가 5만명인가가 그림 팔아서 밥먹는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본 거 또 보면 싫증 느껴요. 콜렉터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콜렉터가 가지고 있는 안목은 작가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항상 앞서가고 새로운 걸 보여주는게 창작하는 사람의 자세죠."

솔직하다. 공간이동은 평면작업을 입체적으로 바꿔 놓았다. '생활속의 중도'. 먹색의 '생활속에서'로 10여년 추구하던 그가 제주생활에서 획득한 것이다. 화면도 점점 밝아진다. "중도란 평등, 평상심, 치우치지 않는 것, 집착하지 않고 현실과 떨어져서 바라보는 세계죠. 마음을 비우고 산다는 것이죠." 그게 어디 쉬운가. 마음공부가 안되면 안보이는 것. 사람들은 평상심을 잃을 때 사고가 난다. 마음이 편치않으면 그림이 안된다. "나는 죽어도 내 육신을 태워가지고 뼛가루 나오면 흙으로 섞어가지고 도자기 작품을 구워라 유언한 사람이에요. 나는 뼈까지도 작품으로 만들어라 했어요." 이 지독한 화가를 깨우치게 한 것은 아무렇게나 살던 잡초였다.

# 마음이 괴로우면 잡초를 봐라

처음엔 돈이 없어서 자전거를 한 대 샀다. 제주의 돌담, 밀감밭을 지나서, 다리를 건너서, 숲으로 들어가면 휴식 공간이 있었다.  잡초들이 마구 사는 곳. 거기서 그는 그들의 질서를 발견했다. "다 엉킨 것 같은데 다 개체로 놀아요. 이게 뭐 여자 머리칼이 엉킨 것도 아니고. 괴로우면 잡초를 들여다 보라고 해요. 잡초를. 엉켰던 마음도 풀리고 후련해지고 행복하죠. 산속의 나무들도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써요. 그런데서 많이 느껴요." 

제주도는 자기가 삶의 기준을 정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곳. 굉장히 터가 센 곳이라는 그는 지금의 서귀포 거처도 4·3의 원혼들이 떠도는 곳이란다. 그들과 산다는 그는 작업시간인 오후 5시반까지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 스스로의 원칙을 지킨다. 휴대폰? 안받거나 끄거나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니까 가능해요." 다만 일주일에 한두번은 골프치기 위해 오후를 비운다. 뒤늦게 배웠으나 그림도 체력 싸움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좋은 작품을 하려면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그림을 안해도, 어떤 공상을 하잖아요. 빈공간, 하늘만 쳐다봐도 많은 생각이 왔다갔다 하잖아요. 어떤때는 작은 것인데 크게 감동 받을 때가 있어요. 잡초, 야생화에서도. 그것을 확대해서 키우는 거예요. 제 작업은." 작품을 호흡처럼 생각하는 이 화가. 내년엔 도조 작업을 서울과 프랑스에서 하자는 얘기가 오간다. 과연 그의 화면의 꼭지점은 어디일까.

# 이왈종과 함께하는 어린이 미술세상

어려서 너무 몸이 약했다. 운명적으로. 가난한 시골에서는 몸도 튼튼해야 했다. 손도 작고, 발도 작아서 쓸모가 없었다. 초등학교때 이북에서 온 미술선생님은 담임이었다. 미제 구호품이 많았고, 그것을 받고 살던 시절, 그때 소년은 친구들이 크레파스를 가져오면 "야, 교환하자" 그랬다. "아마 그 선생님 안만났으면 그림 안했을지 몰라요."

그래서 그럴까. 제주의 자연이 자신의 삶과 미술을 풍요롭게 한 만큼 이 땅에 뭔가 되돌려주고 싶어하는 이왈종. 서귀포시 평생교육원에서 아이들과 그림을 한 지는 5년. 애들 따라온 어른들도 가르친다. 그림에 눈뜨는 시기라는 여섯 살부터 4학년까지 17명 정도. 원래는 3개월코슨데 5년된 아이도 있다. 시를 좋아하는 그는 어른에겐 시를, 아이들에게는 동시를 읽게한다. 거기서 상상력이 뽑아진단다. "내가 배우는게 더 많아요. 애들한테. 인성교육도 함께 하죠."

이 화가의 집엔 24시간 5촉짜리 등불이 항상 켜진다. 술병과 5촉. 둘 중에 하나만 없어도 불안하다. "3시에 일어나면 할게 뭐 있어요? 그때 앉아서 명상시간도 갖고 가장 평온한 시간이에요. 나는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거고, 남들은 괴로워하는 거고. 그 차이에요. 빨리 받아들여요. 나는. 제주도 생활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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