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종이연구가 김경

 "비단은 오백년을 가지만 종이는 천년을 길이 남는다" 했던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시절, 종이때기에 혹해서 살았다. 열정이 없으면 시작도 말라. 집안에 쌀이 떨어져도 절대 풀지 않았다. 인사동 갈 때마다 손가방에 현금 20만원을 담고 나가던, 종이에 미쳐 사는 동안 인사동 일대에선 괴상한 여자로 소문났다. 종이연구가 김경. 요강, 신발, 장, 농, 궤, 필갑, 우산, 종이핸드백…그가 고이 모셔온 오래된 종이 세간들. 전국 곳곳을 다니며 모은 130여 종이유물들과 그가 복원하고 창조해낸 작품들에선 저마다 사연이 흐른다. 그는 신라시대 잠견지, 옥충지 등을 복원했으나 완곡하게 예술가라는 호칭을 사양한다. "종이때기 갖고 신나게 놀았지 뭐". 지금도 그는 그렇게 놀고 있다. 그리고 그 종이유물들의 운명은 지금 제주도로 향하고 있다.

   
 
 

 종이연구가 김경

 1924년 황해도 개성 출생. 1965년부터 우연히 종이수집가의 길로 들어서 홀로 한지 공부에 몰두, 신라 최고의 종이인 '잠견지'와 '옥춘지', 최근에는 '고려지' 복원에 성공했다. 1977년 종이연구회 '한매재'를 창립, 후진을 양성했다. 1986년 공간갤러리서 종이유물전. 88올림픽을 계기로 일본 동경 시즈오카 후지미술관에서 '한국의 종이 유물전'. 1993년 서호화랑에서 첫 개인작품전 '한지예술전'. 1995년 프랑스 파리에서 종이 의상 초대전, 1996년 베를린 종이예술전, 1997년 하와이대 종이예술전, 1999년 일본 긴자 유겐갤러리 초대전, 2000년 제주에서 한매제 종이의상전, 2007년 우토로돕기 종이의상전 등 총 10여회의 개인 및 그룹 전시회. 저서 「이야기가 있는 종이박물관」(김영사·2007).

 
 
# 한순간 종이요강에 홀려 들어선 종이인생

"한순간 종이요강 만나서 놀래고, 아, 이거라도 해봐야겠다 그랬지. 일생 그렇게 놀란 사건은 별로 없었어. 다른 건 없었어." 팔십평생 살아오면서 지름이 반뼘 밖에 되지 않은 그 작고 새침한 종이 요강단지에 놀랐다니. 40대의 그녀가 사로잡혔던 그 요강, 대체 어떤 것이길래. 안동마을 대가댁 사랑방 구석에 앉아있던 검은옻 입힌 항아리. 6대조 시할아버지가 손녀딸 시집갈 때 꽃가마 안에 넣어주었다던 요강. 새악씨 소피와 토악질을 담은 채 돌아온 그 요강. 그가 세 번이나 왔다갔다 설득하자 노마님이 결국 내놓았던 300살 먹은 그 요강단지였다. 그것 들고 조마조마 안동땅을 벗어나면서였다.

한지를 지푸라기처럼 길게 잘라서 새끼를 꼬아 놓은 것을 순 우리말 '노엮개'('지승'은 일본식 표기)라 부른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놋요강, 사기요강, 스텐레스 요강 등은 있지만 이런 종이 요강은 처음이었으니. 예기치 않은 우리의 삶처럼, 다만 그렇게, 그도 한순간에 홀렸다. "안동 하회마을 종이요강에서 시작된거야. 처음 이것이 요강인지 뭔지를 모르는데 할마시가 요강이라고 하더라고. 그때부터 종이로 맨든 것 있다면 어디든 달려갔어."

그렇게 수집한 한국종이 공예가 지닌 미와 신비가 세상에 첫 선을 뵌 것은 1986년. 이후 종이공예의 매혹행진은 이어졌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일본 동경에서 38일 동안 열렸던 '한국의 종이 유물전'은 일본 미술계를 놀라게했다. 1980년, 90년대 그는 하와이 파리 뉴욕 베를린 등에서 전시회를 열어 한지 시연도 해보였다. 외국인들은 그저 감탄사만 연발했다.

그가 일본 우토로마을 사람들을 돕기위해 종이의상전을 연 것은 지난해 6월. 우토로에는 강제 징용된 한국인 후손 203명이 철거위기 속에 살고 있다. "광복후 긴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식민지배의 아픔이 치유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뼈저렸어요. 1989년부터 1300명의 일본여성들이 먹여살려요. 일본 정부에 대고 싸우는거죠. 나도 같이 얘네들하고 흥분해가지고 우토로돕기 운동을 한거죠." 일주일간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고, 그 일부의 기금을 전달했다.

# 제주 모슬포에서 만난 종이신발에 가슴 '철렁'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두 번째 사건은 제주도에서였다. 제주도 모슬포의 어느 잠녀가 고팡에서 갖고 나온 종이신발을 보는 순간이었다. 나무로 만든 골도 끼워있던 따스하고 촉감이 부드러운 종이신. 조선시대 양반님들의 실내화로 애용되던 그 종이신발.

1980년대초. "인사동에 골동품 할아범들이 다 알아. 제주도에서 온 골동쟁이들도 많았어. 제주도 농이 젤 싸거든. 제주 돌방아 파는 할아범 서넛 있었어. 그 할아범 한테서 얘기를 들었어." 그 얘기 듣자마자 공항으로 갔고, 제주에 내려서는 모슬포까지 택시타고 간 것. 종이신 보자마자 그날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짐꾼 트럭 앞에 서서 무턱대고 손짓했지. 그거 공짜로 타고 서귀포로 나와서 서울에다 전화했어. 남편이 '알아줘야돼. 종이에 완전히 돌았어' 하더라고. 종이신발이 있다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민속학적, 애국적도 아니고 어느 한순간 그런 거 있잖아." 이후 틈만나면 제주도로 달려왔다.

"그 종이신이 적당히 낡았지만 귀양살이 간 사람의 것이야. 고향의 아내를 기다리며 종이신 하나 만들고 죽어갔나봐." 아내 죽고 나중에 아들이 제주도에 왔고, 제주 잠녀와 결혼해서 살던 아들도 죽은후였다. 그는 잠녀에게 약간의 사례를 하고 그것을 얻었다. "그 집을 나오자마자 가운데 뭐가 있을 것 같아. 참지못해 비행기 속에서 한오리씩 종이를 풀어봤지. 거기엔 한시가 쓰여있었지. '月白雪白天地白(달도 희고 눈도 희고 하늘땅은 흰데…)은 김삿갓 시풍인것 같아." 당시 그는 사흘동안 머무르면서 모슬포 포구를 서성거렸다. "'아, 나는 언젠가 제주도와서 살거야' 생각이 가슴을 쳤지."

이 종이신을 얻은 후 노엮개 엮기를 하며 재현해내느라 온통 손가락 뼈마디를 혹사시켰다는 김경. 그는 세계 여러 도시에서 전시회를 할 때마다 요강과 종이신발, 핸드백은 반드시 갖고 다녔다. "그것이 한 곳에만 묶여있던 망자의 영혼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해서죠."

# 세계적인 잠견지, 고려지 등 복원

그가 새하얀 한지를 내보였다. 종이스카프다. 가로로 접은 종이를 펼쳐서 손으로 세로로 잡아 쓸어내니 주르르 주름이 만들어진다. "40개 종이종류가 있어. 이건 옥춘지야. 옥춘지. 예쁘죠?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종이야. 우리 한국의 종이는 세계적인 거예요. 그래도 종이 만든 것을 갖고 뜨기나 하지. 만드는 이나 비슷하게 연구한 사람들이 없어." 음악인 장한나, 신영옥 등 그의 종이옷을 입고 뽐낸 이들 어디 한둘인가.

한지 중 가장 살결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최상급은 신라시대 '잠견지'. 중국인들이 이렇게 희고 고운 종이는 누에고치로 만든 것이 틀림없다며 반해서 붙인 이름. "종이발명은 중국이 했지만 종이 선진국은 한국이었어요." 종이 조각들을 두들겨서 틀에 집어넣으면서 이들에게 영혼과 생명을 불어넣는 김경. 그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생명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부드러운 아름다움, 질기디 질긴 삶처럼 강한 우리의 한지가 아닌가. 닥나무 가지를 푹 삶아 껍질을 벗겨내고 다시 속살만 잿물에 푹 삶아내 나무 방망이로 곤죽이 되도록 두드린다. 닥죽이 만들어지면 여기에 닥풀즙을 잘 풀어서 장방형 대나무발로 잘 흔들면서 종이를 떠낸다. 물에 녹지 않는 종이여서 옛 사람들은 장롱도 만들고 가방도 만들고 종이우산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보온성도 있어 속옷도 만들었다.

"저는 이 종이가 온 몸이 잠긴 채 시련을 겪은 물을 '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제 존재의 상극인 저 눈물속에서 온전한 몸으로 있지 못하고 살이 다 녹을 정도로 시달리고 당하면서 끝내는 그것을 견디어내면, 저렇게 그냥 평범한 종이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구극, 극치의 세계를 이루어낸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이미 세상 떠난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1995년 미국의 한 대학 초청강연에서 한 말이다. 그때 그녀는 신라시대 잠견지와 옥춘지를 발견하고 재현해 낸 김경의 옷을 입고 있었고, 그 옷이 구겨질새라 함부로 움직이지도 않았단다. 최명희는 그가 17년 우정을 나누던,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친구. 종이 여행도 함께 했었다.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가슴 아리다.

# 내년 제주에 종이박물관 만드는 것 꿈

지금 그의 40년 벗들인 종이세간들과 그의 종이 작품들은 제주도와 서울에서 발묶여 있다. 어두운 골방, 궤짝 안에서, 거실의 오동나무 반닫이 장 깊숙이서. 그는 수백년 어둔 방에서 하소연하는 그것들의 한서린 소리들을 듣는다. 이 주인은 지난해 이젠 그것들을 나들이 한번 시켜주마며 책을 냈다. 6년 걸려 낸 「이야기가 있는 종이박물관」. 사진작가 김중만의 렌즈는 옛 것의 그림자까지 고스란히 찍어냈다.

어려서 아름다운 것이라면 혹하고 끼 많았던 그는 60년대엔 영화 시나리오도 썼었다, 그의 마지막 숙원. 긴 세월 부둥켜 안고 살아온 분신과도 같은, 이 종이들의 운명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주인을 찾아주는 일. 결국 이 종이들도 마음이 있어 제 갈 곳을 찾는다는 이 종이연구가는 끝내 그들의 마음은 제주도라 했다.

그는 그가 낸 책의 끝에서 종이와 더불어 섬으로 간다고 썼다. "하다가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인생 살아야죠." 지난해 지인의 소개로 제주도 초대 나들이 갔다 그만 남겨두고 온 그 곳에 어여쁜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 오래전 닥나무 밭이어서 제주도 한지 생산지로 이름 높았다는 곳 한경면 저지리 예술인 마을. 형편이 닿는다면, 내년 봄에는 번듯하게 그들의 세상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종이 박물관이 생기면 신기하잖아요."

지난 5월 그는 조용한 조력자였던 남편을 먼저 보냈다. 그 맺힌 설움도 종이를 주무르면서 녹여내는 것일까. 지금도 하루 열시간 이상 한지재료를 만드는 열정적인 이 팔순의 종이인생. "이것을 물속에서 꽉 짜가지고 이렇게 한시간만 주무르면 종이는 광목처럼 돼요. 손에 오관이 다 들어 있잖아요. 이게 손운동도 크게 되는거야. 치매 걸리고 자시고할 시간이 없어. 맨날 손으로 주무르고, 쳐대고… 자기네는 내가 얘기한대로 사건을 만들고, 자연풀이야. 이 종이를 하루종일 해서 열장 못 만들어요. 늙어서 심심하니까 어떡하겠어?"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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