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무게.특성 도외시한 발상
특별법 제정 요구 당시 초심 필요
올 무자년은 제주4.3이 60주년을 맞은 해였다. 지하에 갇혀있던 4.3이 조금씩 세상 밖으로 꺼내져 햇빛을 쬐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진실규명의 역사 한복판에 ‘제주4.3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양조훈 수석전문위원이 있었다. 지난 1988년 3월 4.3취재반을 결성, 당시 금기시되며 철저히 감춰졌던 4.3의 역사를 취재하기 시작한 이래 20년간 한길을 걸어온 그를 만나 4.3위원회 통폐합 등 새로운 시련을 맞고 있는 4.3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고견을 들어봤다. 
4.3위원회 수석전문위원 양조훈
“제주4.3특별법 제정은 기적 같은 일”
△4.3취재반의 결성 계기와 초창기의 어려움은.
-1988년까지도 4.3은 금기의 언어였다. 기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1987년 6월항쟁의 민주화 열풍은 기자들 사이에서 이제 더 이상 4.3에 침묵해선 안된다는 정의감을 일깨우며 결국 4.3취재반 결성의 동력이 됐다. 그 무렵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4.3은 ‘북한 공산당의 지령에 의해 일어난 제주폭동’으로 기술돼 있었다. 그 붉은 색을 걷어내고 진실을 찾는 일이 초창기 가장 어려운 점이었다.
△4.3진상규명 활동의 당위성은 어디에 있는가.
-1992년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제주4.3을 20세기 세계 100대 사건의 하나로 선정했다. 선정 이유로 첫째 제주섬과 같은 좁은 공간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점, 둘째 이런 중대한 사건이 한국 안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점 등을 꼽았다. 4.3은 단순한 제주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민주화 수준과 직결되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냉전시대의 대표적인 국가폭력사건인 4.3을 ‘없었던 역사’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 진상규명의 당위이다.
△4.3특별법 제정 당시를 회고한다면.
-한마디로 ‘기적’같은 일이었다. 1999년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는다고 요란했다. 우리는 “20세기에 벌어진 4.3을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21세기를 맞느냐”고 소리쳤다. 그해 10월 한나라당 소속 제주 지역 국회의원들이 4.3특별법을 제안했고, 제주도내 24개 유족 및 시민단체가 ‘4.3특별법 쟁취 연대회의’를 결성,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제주도민들이 이에 성원했다. 여기에다 김대중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다. 이런 조합이 결국 기적처럼 4.3특별법을 탄생시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한 결과였지만, 여야 정치인 중 수훈갑을 들라면 추미애.변정일 의원(당시)을 꼽고 싶다.
“제주4.3은 과거사 정리의 모범사례”
△4.3위원회 활동을 ‘도전과 응전의 세월’이라고 표현했는데.
-4.3위원회 활동은 결과만 발표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어떤 논쟁과 갈등이 있었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위원 20명 중 8명이 장관급 정부 인사들이다. 민간인 위원 중에도 국방부와 경찰청에서 추천한 위원들이 있었다. 면면에서 짐작되듯 성향이 다른 위원 구성은 이미 치열한 논쟁과 대립이 불가피한 구조였다. 위원회 밖에서도 도전은 계속됐다. 4.3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 사과가 잘못됐다고 위헌심판까지 당했다. 보수단체는 헌법재판소에 18만5689명의 서명지까지 제출했다. 이러한 내외의 도전에 대응하면서 보낸 8년의 세월이었기에 이를 압축해 ‘계속되는 도전과 응전의 세월’이라고 표현했다.
△4.3위원회 백서가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 그런 속에서 보람이 있었다면.
-4.3위원회는 내실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과거사 정리의 모범사례라는 평가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보람을 느낀다. 이번에 백서를 발간하면서 ‘읽히는 백서’를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단순 나열을 탈피하고, 이념 논쟁 등의 진통과 시행착오, 쟁점사항 등도 기술했으며, 마을별 피해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희생자 지도를 비롯해 58건의 도표, 155장의 사진 등을 배치해 시각적인 효과도 살렸다.
△위원회 활동 중 어려웠던 일 두 가지를 꼽는다면
-4.3진상조사보고서 통과와 수형자를 희생자로 결정하는 과정이다. 보고서 통과 과정에서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 등 보수단체의 반대가 극심했다. 당시 고건 총리가 6개월 동안의 수정기간을 두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고 총리는 보고서 심의를 위해 모두 8차례 회의를 직접 주재할 정도로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군법회의 수형자를 희생자로 결정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법무.국방 장관 등이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박재승 변호사 등 민간위원들의 선전으로 고비를 넘겼다.
“진상조사보고서, 4.3의 역사 공식화”
△4.3진상조사보고서의 의의는.
-그동안 금기시됐던 4.3 기억들을 공식화시킨 점이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을 파헤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의 사과라는 성과도 이끌어냈다. 이 보고서는 또한 특별법 규정에 의해 진상조사와 정부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된 법정보고서다. 따라서 누구든 임의로 고칠 수 없고, 이를 수정하려면 법 개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 2004년 국방부가 발간한 ‘6.25전쟁사’중 4.3 관련내용 35건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 법정보고서의 내용과 배치됐기 때문이다.
△진상조사보고서의 한계를 지적한다면.
-먼저 역사적 평가가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특별법이 규정한 사건의 정의와 목적의 범위 안에서 서술할 수밖에 없는 정부 보고서의 한계이기도 하다. 행방불명 희생 실태와 마을별 피해 실태를 총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가해자의 문제, 진압체계의 규명 등이 보완돼야 한다는 주장들도 있다.
△이런 문제를 포함하여 위원회의 앞으로의 과제는.
-개정된 4.3특별법에는 4.3평화재단에서 추가 진상조사를 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재단에서 추가 진상조사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그리고 재단에서 조사한 결과를 정부가 어떻게 수용하느냐는 것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또한 위원회의 과제로는 유족들의 생계비 지원, 추모기념일 지정, 평화공원 3단계사업 방향 설정, 발굴된 유해 후속사업 등이 있다.
“4.3 현주소 점검과 미래 동력 고민해야”
△4.3위원회의 통폐합에 대한 의견은.
-제주4.3의 역사적 무게나 특성을 도외시한 발상이다. 이를 발의한 의원은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과거사 위원회 통폐합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차라리 과거사 위원회를 약화시키거나 폐지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하다. 13개 위원회를 한 곳으로 집결시켜 도매금으로 처리하겠다는 그 발상 자체가 더 ‘비효율적’이다.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말한다면.
-4.3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던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것은 바로 제주도민의 단합이다. 제주특별자치도와 도의회, 유족회와 관련단체, 지역구 국회의원과 각 정당 제주도당이 한 목소리로 공동대처한다면 지금까지 닥친 많은 시련을 잘 헤쳐 온 것처럼 이 문제도 풀릴 것으로 본다.
△추가하고 싶은 말은.
-4.3위원회 활동에 미흡한 점도 있고 아쉬운 점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10월21일자 경향신문 사설을 보며 제주4.3의 위치를 생각해 봤다. 4.3과 같은 해에 발생한 여순사건 60주년 위령제에 정부 인사는 고사하고 지역 기관장 1명도 참석하지 않았고, 유일한 시설인 위령탑마저 유족들의 성금으로 지은 내용을 전하면서 제주4.3 60주년 위령제와 비교하고 있었다. 그만큼 4.3은 다른 사건에 비해 앞선 것이 사실이다. 반면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이제 4.3의 현주소를 정확히 점검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을 어떻게 재충전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서울=김철웅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