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철거민 농성장에서의 사고를 유감스럽게 바라보며,
우리는 피라미드와 같은 세계적인 유적을 보면서, 경탄하고 부러워한다. 또 유럽의 고딕성당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조형물에 감탄하게 된다. 중국의 자금성을 보고나면, 우리의 경복궁이 웬지 초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돌아보면 고대사의 이러한 거대한 유적들의 뒤에는 강한 권력에 의한 기반이 있었으며, 이를 위한 수없이 많은 희생을 전제하였음을 알게 된다. 로마의 네로황제가 그러했고, 중국의 진시황이 그러했었으며, 고딕의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것도 그 이면에는 중세 종교사의 우울한 그림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세계의 수많은 문화유적들은 권력을 가진 자의 힘을 과시하는 결과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의 우리의 집은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왔다. 물론 그것을 업으로 하는 전문 목수가 있었지만, 이웃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집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상량식과 같은 행사는 온 동네의 잔치가 되어왔던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이웃의 힘을 합치는 공동체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집을 지음에 있어서, 이웃의 도움을 빌리지 못한다. 오히려 민원이나 제기하지 않아주면 참 고마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는 집을 짓는 과정에 있었던 공동체의 문화가 사라진 탓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건축의 방식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이 담아있었다. 그런데 최근의 대규모 개발계획을 추진하는 방법을 보자면, 마치 고대의 절대 권력자의 방식을 닮아가는 인상을 받게 된다. 엊그제 용산 재개발 구역 철거민 농성장의 사고는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개발을 위해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 로마에서나 있을 법한 태도이다.
위정자에게 있어서 민주정치라는 것은 독재정치에 비해서 매우 불편한 방식이다. 건축가에게 있어서도 건축주가 1인이 아니라, 단체인 경우에는 설계하는데 엄청나게 애를 먹는다. 이유는 그 만큼 많은 사람과 협의를 해야하며, 그 과정이 길고 지루하고 힘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주관을 우선으로 판단하게 되어있으며,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대개의 건축가들도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디자인을 주도하려는 성향을 갖는다. 하지만, 상식이 있는 자라면 여러사람의 의견을 물어가는 불편한 민주적 방식이 일방적 결정론보다 훨씬 진보한 사회제도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개발을 추진함에 있어서 법과 제도를 내세우기 전에, 그 법과 제도를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대규모의 개발이하는 것이 민의를 읽지 않고서 진행해선 안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공성을 갖는 개발이라는 것은 그 자금력도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거니와, 그 결과도 시민을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용산 철거민 농성장의 사고를 바라보며, 참다운 민주적 개발방식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며, 이제는 우리가 도시계획 및 개발의 기법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고 성실하게 접근할 때임을 통감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