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쇄환정책 인명보호 아닌 노동력 착취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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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팔도여지도(1819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
해랑도를 수색하다
연산군 6년(1500) 3월 20일, 왕은 다시 해랑도 수색에 대한 방법을 의논하게 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섬이 바다 한가운데 있어 사방으로 다 통하므로, 만일 먼저 사람을 파견해 보내어 정탐만 하고 군사를 들여보내지 않는다면, 저들이 반드시 이를 알고 먼저 도망하여 숨을 것이니, 지금 마땅히 그들이 깨닫지 못한 틈을 타서 군사를 들여보내 섬을 먼저 포위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출입하는 길을 막아 놓고 사복 입은 장사(壯士)들을 시켜 유서(諭書)를 가지고 들어가서 조용히 설득하되, 좋은 말과 이익 되는 말을 해도 오히려 듣지 않는다면, 군사의 위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평안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어서 저들에게 그것을 알려 비밀리 도망가게 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급선무로 빨리 거행해야만 쇄환(刷還)할 수가 있다'}
정조사(正朝使)로 갔던 사신이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조선 국왕이 주청(奏請)한대로 해랑도 수색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칙명(勅命)이었다.
"우리 중국의 뱃사람이 말하는데 해랑도에는 사슴 잡는 조선사람들이 있고, 섬 안에 불이 밝은 것을 보고 가본즉 구리 숟가락 등의 물건이 남아 있었다.
조선의 도망자거나 혹은 중국 근방의 군사 아니면 백성이 몰래 들어간 것인지 모른다. 만일 일찍 축출하여 해산시키지 않으면 세력이 크게 되고 모이는 사람이 더욱 많아져 다른 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해랑도가 어디에 소속된 지방인지 몰라 따로 사신을 보내지 않겠으니, 칙서가 가는 대로 왕은 사람을 보내어 섬에 도망해 들어간 백성들을 전부 찾아내어 본국으로 데려가되, 신중하게 대처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일 중국 사람이 납치됐거나 표류한 사람들이 있거든 즉시 송환하고 그곳에서 데려온 사람들의 성명과 숫자를 보고하기를 명한다"
황제의 칙서가 도착한 지 3개월 뒤 해랑도 수색 책임자인 초무사((招撫使) 전임(田霖)은 병사들을 14척의 포작선(鮑作船)에 나누어 태우고 해랑도에 잠입했다. 그러나 이미 수색하러 온다는 사실을 안 해랑도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벌써 그곳까지 흘러들어간 것이다. 해랑도의 인가(人家)는 이미 철거돼 있었고, 사람의 발자취는 있으나 농사짓던 소 세 마리만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섬 가까운 곳에서 접전을 벌여 4명을 생포한 후 그들을 심문하여 주변 섬의 남녀 70명을 사로잡고, 또 바위 구멍을 수색하여 31명을 다시 체포하였다. 이들은 해랑도 주변 흩어진 섬을 경작하여 농사를 지으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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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원주민 1900년 | ||
해랑도 주변 섬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조선 사람이 중국 여자와 같이 살면서 낳은 아이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5세 이하의 아이가 4인이나 되었다. 황제의 칙서대로 중국인은 중국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러나 조선남자와 중국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의 송환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조선의 법대로라면 아이들은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어미가 상국(上國:중국) 여자이기 때문에 조선의 법대로 처리했을 경우 분명 중국으로부터 힐책이 따를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아이들은 어미를 좇아 중국으로 보낸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해랑도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왕은 해랑도를 기습하여 사람들을 체포하고 돌아온 초무사((招撫使) 전임(田霖)은 1급을 가자(加資)하고 말과 안장을 하사하였다. 나머지 관리들도 직급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말을 상으로 주었다. 향리(鄕吏)들은 역(役)을 면제해 주었고, 보충대(補充隊)는 관(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그리고 뱃사람들 또한 공로에 따라 10필 내지 7필의 베를 나누어 주었다. 따라갔던 공노비와 사노비에게도 각각 삼베 5필씩의 상을 내렸다.
그러나 다시 시간이 흐르면서 해랑도는 해적의 소굴이라는 눈총을 피할 수가 없었다. 평안도 밀매업자들이 체포될 때마다 해랑도는 의심받는 섬이 되었다. 항상 조정은 해랑도 사람들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해랑도 사람들이 농사만으로 생활하는지, 조선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그곳에 들어와 사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보를 캐고 다녔다. 특히 그들이 해적(海賊)들과 서로 내통하거나 잡은 고기를 가지고 육지에 나와 장사하는 지 유심히 살피라고 명을 내렸다. 더욱 궁금한 것은 그곳의 땅은 얼마나 기름지며, 혹시 병기(兵器)를 준비하여 해랑도를 방어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랑도에 표류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말도 제각각 달랐다. 조선인 표류자는 해랑도에 중국 사람 수천명과 조선 사람 수백명이 살고 있다고 했고, 중국인 표류자 최당(崔堂)이라는 사람은 해랑도에 사냥하러 갔다가 조선 연안에 표류했다고 하면서 육로(陸路)로 돌아가기를 죽기로서 거부하고 해로(海路)로 돌아가기를 원하자 조선의 관리들은 그를 해적으로 의심하여 군사를 보내 중국 요동으로 압송하였다. 압송하는 관리들에게 중국 사람들이 사사로이 해랑도에 옮겨와 살 수 있는 지 꼭 알아오라고 당부하였다.
36년(1603) 7월1일, 비변사에서는 해랑도의 해적에 관한 대책을 내놓았다. 해랑도 해적들은 양곡을 날라 오는 배를 약탈한 뒤로 이를 좋아하고 있어, 평안도와 황해도 연해에 마구 출몰해 약탈을 했다.
그들은 병기(兵器) 없이 배에 돌덩이와 막대기만을 가지고 바다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지방수령에게 사려 깊고 용맹한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배 속에 활과 포를 감추어 두고, 짐을 운반해 오는 배처럼 꾸며 해랑도 해적들을 유인하여 생포하는 것이 좋다는 방책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몇 년이 흘러도 해랑도 해적들의 약탈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잡으러 온 병선(兵船)을 빼앗고 어채선(魚採船)을 불태워 어부들을 피랍 하였다. 갈수록 해적들이 신출귀몰하여 잡지 못하는 지경이 되자 비변사에서는 그 해적들이 과연 해랑도 해적인지의 여부가 의심스러웠다.
현재 해랑도에 사는 사람들의 국적문제 또한 물위로 떠올랐다. 해랑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중국에 속하는 지, 해적 또한 모두가 해랑도 사람인지 헤아릴 수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하루빨리 해상을 안전하게 방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비변사에서는 다시 각도(各道)의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에게 강력한 명령을 내려 기어이 해적들을 잡도록 왕에게 권유하였다. 이에 대해 역사 기록자(史臣)는 말한다.
"해로(海路)로 도망한 백성들이 10명 혹은 100명씩 떼를 지어 재빠른 작은 배를 타고 해상에 출몰했다가 왕래하는 배들을 만나게 되면 그 세력이 강약(强弱)을 보아 침범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니, 이는 좀도둑이 도발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감사와 병사가 기묘한 계책을 써서 때려잡지 못하고 조정으로 하여금 비밀리 계획을 세워 큰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이는 관리를 임명할 때 이미 적임자를 고르지 못한 탓인데, 그들이야 탓할 것조차 없다."
해랑도의 역사적 평가
지봉(芝峯) 선생은 "해랑도는 우리나라와 가까워 중국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망가 점점 불어났다…요즘은 해적이 출몰하여 서해안 지역을 노략질하니 그 해를 입지 않은 달이 없었다. 백령도, 안흥(安興), 마량(馬梁)에 진(鎭)을 설치하고 대비하니, 그 화가 조금 잠잠해졌지만, 후일이 걱정스럽다."고 했다.
순암(順菴) 선생은"우리나라 서남해(西南海)가 중국과 서로 통하고, 그 사이에 섬이 수없이 많아 지도에 들어가지 않는 섬이 필시 많을 터이니 부역(賦役)을 피해 도망간 자들이 무리를 이루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 해상의 방어(防禦)가 소홀하여 바다의 이해(利害)를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은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성호(星湖) 선생은 "해랑도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문적(文蹟)은 찾을 길 없으나 이들이 우리에게 해로운 존재였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있다. 만약 중국의 기강(紀綱)이 해이하여 섬 오랑캐들이 제멋대로 욕심을 부려 우리 양호(兩湖)의 조운(漕運)을 겁탈해 간다면, 우리나라는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게 될 뿐이다"라고 했다.
오주(五洲) 선생은 "해양도(海洋島)는 금주(金州) 동쪽 바다 가운데 2백리에 있다. 해랑도(海浪島)라고도 하는데 그 진위는 알 수가 없다. 양서(兩西) 해중(海中)에 있으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광해군 때에 이르러 해랑도를 신도(薪島)와 함께 불렀다. 해랑도 가까이에 신도가 있기 때문이다. 순조 8년에 신도(薪島)에 첨절제사를 설치하였는데 즉 신도가 양서(兩西) 해중(海中)에 있어서이다. 이미 지도에 기록돼 있어 지금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중국과 조선 국경의 해랑도 주변과 서·남해의 섬들은 모든 도망자들의 천국과도 같다. 조선의 백성들은 과다한 세금과 노역을 피해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면 어떤 섬을 마다하고 숨어들었다. 제주의 포작인인 경우 수군과 격군에 동원되는 것을 꺼려 가족을 배에 태워 바다의 유랑을 선택한 것도 바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조선초기부터 조선후기까지 섬에 숨어든 백성들을 강제로 데려오는 도민쇄환정책(島民刷還政策)은 겉으로는 왜구들로부터의 인명보호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부족한 노동력의 착취를 위한 조치였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