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교체기 왕족 유배 많아…제주에 금은기(金銀器) 많이 남아있어

   
 
  징키스칸의 무덤.  
 

유형(流刑)이라는 이름의 형벌(刑罰)

죄란 무엇인가.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그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한 규정들을 위반한 행동을 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 무죄(無罪)와 유죄(有罪) 사이의 사회적·도덕적 구분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해 봐야 한다.

죄는 사회적 위반 행동으로 작게는 도둑질에서부터 크게는 반역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그러나 무죄와 유죄의 경계는 매우 모호할 수가 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회적 위반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작게나마 사회적 위반 행동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결국 죄는 사회적으로 공표돼야만 유죄라고 할 수가 있는 데, 자신의 위반 행동이 적발 되었을 때 유죄라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말하는 죄형법정주의의 맥락에 닿아 있다. 그렇다고 죄는 적발되었을 때만 성립이 되는가? 적어도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죄를 짓고 적발되지 않았다고 하여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죄는 개인적으로만 성립이 되며, 사회가 모르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인간은 양심이라는 무기가 있다. 양심은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심리상태다. 그 양심은 존재 자체에서 발생하는 천성(天性)이 아니라 교육에 의해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행동에 대해 선(善)과 악(惡)의 범위는 그 사회의 관습이나 사회체제와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사회나 시대마다 죄의 규정이 다르다는 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도덕적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형벌 중 유형(流刑)은 당사자에게는 고통이었으나 유배 지방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 혜택을 받은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죄인으로서 유배인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한때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유배인들에 의해 소위 귀족문화라 할 수 있는 중앙의 양반문화가 지방으로 흡수되는 문화접변 현상을 낳기도 하였다. 특히 제주도는 이 유배로 인해 다양한 양반 문화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지방의 토호들은 유배인들의 정신적인 영향 아래 중앙 진출을 꿈꾸기도 했다.

사실상 유배는 문화의 이동이자, 새로운 문화의 정착으로 귀결되었다. 제주도에 유배 온 사람들은 중죄인이자 소위 정치범들로서 전쟁의 패배와 당쟁의 한 가운데서 시대의 아픔을 안고 산 인물들이 많았다. 

유형(流刑)은 죄에 대한 일종의 벌(罰)이다. 죄에는 반드시 미미하든 그에 준하는 벌이 따른다. 형벌제도는 인류 출현이후 이미 오래전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살인, 도둑질은 어떤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윤리 규범의 첫머리에 해당했다.

모반죄는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힘의 문제이기 때문에 거사(擧事)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에 따라 죄의 기준은 달라진다.

최초의 유형(流刑) 제도는 7세기 전후, 수(隋)·당(唐) 시대의 문헌에 나타난다. 당시 형벌에는 5가지가 있었는데, 신체에 가하는 형(刑)으로서 태형(笞刑)과 장형(杖刑), 자유형(自由刑)으로서 도형(徒刑)과 유형(流刑), 그리고 생명형(生命刑)으로서 사형(死刑)이 있었다. (金奉鉉, 2005)

고려시대의 유형(流刑)은 당나라의 법률에 영향을 받아 죄과(罪科)에 따라 2000리·2500리·3000리로 나누었다.

즉 2000리로 가는 유형자에게는 17대의 매를 가하고 징역 1년에 속동(贖銅) 80근을 징수했고, 2500리로 가는 유형자에게는 18대의 매를 가하고 징역 1년에 속동(贖銅) 80근을, 3000리로 가는 유형자에게는 20대의 매를 가하고 징역 1년에 속동(贖銅) 80근을 징수했다.

조선시대의 유형(流刑)
조선시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했던「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의 5형(刑)은 고려조보다 죄에 대한 형벌이 강화되었다.
죄에 따라 태형(笞刑)은 10·20·30·40·50대로 구분하여 싸리나무로 볼기에 매를 때린다. 장형(杖刑)은 60·70·80·90·100대를 긴 가시나무로 볼기에 때리는 형벌이다.

도형(徒刑)은 이보다 약간 무거운 형벌로서 1년 징역인 경우 곤장 60대, 1년 반 징역은 곤장 70대, 2년 징역은 곤장 80대, 2년 반 징역은 곤장 90대 3년 징역은 곤장 100대를 친다.

유형(流刑) 또한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곤장 100대를 치고 2000리에, 곤장 100대에 2500리에,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로 내보는 형이다. 그리고 사형(死刑)에는 목매다는 형(絞刑)과 목 베는 형(斬刑)이 있었다.

특히 조선조의 유형(流刑)인 경우「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의 규정대로 따르기는 어려웠다. 땅이 넓은 중국의 경우를 본받기에는 조선은 너무나 땅이 좁았다. 그래서 세종 12년(1430)에 유배의 지방을 아예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서울·경기에서 유배3천리의 형을 받으면, 경상, 전라, 함경, 평안도로 배치하고, 황해도에서 유배 3000리를 받으면, 경상, 전라, 평안·강계도(평안북도), 의주 각관에 배치한다. 평안도에서 유배 3000리를 받으면, 충청도, 함길도의 중앙 각관에 배치하는 등 유배를 받은 지역에서 반대편 지방으로 유배를 가야했다.

유형(流刑)을 다시 세분하면, 죄인을 고향에서 1천리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천사형(遷徙刑)이 있고, 죄인에게 특정지역을 미리 정해 그곳 지방관에게 감시의 책임을 맡기는 부처(付處) 형(刑)이 있으며, 유배지의 배소(配所)를 정해 그 장소에 한하여 거주하도록 하는 안치(安置) 형(刑)이 있었다.

이 안치형은 왕족이나 고관(高官)에 한하여 적용을 했으며, 다시 죄과(罪科)에 따라 본향(本鄕安置)안치와 절도안치(絶島安置)·위리안치가 있었다. 본향안치는 죄인을 고향에 유폐(幽閉)시키는 경우,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는 유배인을 고향으로 이송하여 고향에 유폐시키는 것을 말한다.

절도안치는 유형(流刑) 가운데 가장 가혹한 격리조치로 육지와 멀리 떨어진 작은 섬에 유폐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흑산도 같은 섬의 유배는 특별하게 왕의 교지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제주도의 경우 죄명(罪名)이 무거운 자가 아니면 유배를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추자도와 제주도에는 특별하게 왕의 교지(敎旨)가 없으면 정배할 수 없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유배자의 거주지 둘레에 가시가 달린 나무로 둘러싸 그 곳에 유폐시키는 일종의 가택연금(家宅軟禁)이라고 할 수 있다.

충군형(充軍刑)에는 곤장 100대를 맞고 군역(軍役)에 복무하는 것, 곤장 100대 후에 변경(邊境)에서 변방을 지키는 군인이 되는 것, 곤장 100대 후에  수군에 편입되는 것 등 3종류가 있었다. 제주 삼읍에서 죄를 지은 자들은 삼읍 안에서 상호 유배하라는 규정도 있었다.

   
 
 

명태조 주원장

 
 
바다를 건넌 왕족

제주는 바다 밖 절도(絶島)로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멀고 험악하여 원악유배지(遠惡流配地)라고도 한다. 사형(死刑) 다음의 중죄인이나 사형에서 감면된 자들이 유배 오는 곳이다. 또한 유배 중에 죄가 더해져 사약을 받고 죽는 곳도 바로 제주섬이었다.
고려시대의 제주에 유배 온 사람들은 전쟁에 패한 왕족들이 많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忠烈王) 3년(1277) 몽골에서 40명의 죄인을 탐라로 보내었다. 그러나 탐라에 온 죄인들을 불안하게 여겨 관군으로 하여금 감시를 소홀히 하지 말도록 하였다. 

충혜왕(忠惠王) 원년(1340) 2월에 몽골에서 다시 패난해(蘭海) 대왕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몽골에게 패한 이유 때문이었다. 몽골은 1234년에 금을 멸망시켰고, 1279년에는 남송을 정복하여 중국 전체를 지배하였다.

1260년부터 1294년까지 몽골은 세계 최고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1368년이 되면 몽골은 명조에 의해 중국에서 축출되었다. 1370년 이후 서부지역은 티무르 제국(1336~1405)에 합병되었다.

고려 충혜왕(忠惠王) 4년(1343)에는 학선이라는 스님이 제주도에 유배를 왔다. 그는 거문고를 잘 탔고,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중국어와 몽고어를 잘하여 왕이 그를 존숭하여 스승으로 받들자 급기야 학선은 왕실에서 왕이 와도 절을 하지 않는 등 자세가 매우 거만하여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다.

왕의 스승이라는 지위를 믿고 왕명(王命)이라고 속여 맘대로 죄인을 풀어준 죄 때문에 멀고 먼 제주도에 죄인으로 온 것이다.

고려 신우(辛禑) 8년(1382) 7월 명나라는 몽골 운남(雲南)의 양왕과 백백태자(伯伯太子), 그의 아들 육십노(六十奴), 내시 복니(卜尼) 등을 제주도로 압송하여 안치시켰다. 고려 조정에서는 "당신이 한번 노한 결과 전쟁이 끝나고 천하가 안정하게 된 것은 고금(古今)에 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여 몽골을 평정한 명나라 황제께 축하의 표문(表文)을 지어 받쳤다.

1389년이 되면, 명나라 황제는 백백태자(伯伯太子)의 아들 육십노(六十奴)의 일행을 명나라로 소환하였고, 1년간 명나라에서 지내다 제주에 돌아온 육십노는 1391년에 물로 막힌 섬에 외롭게 묻혔다. 그로부터 2년 뒤 양왕의 자손인 애안첩목아 등 4명이 다시 탐라에 와 백백태자와 함께 모여 살았다.

조선 정종(定宗) 2년(1400) 9월에 제주에 살고 있었던 백백태자가 시종을 보내어 말 3필과 금가락지를 바쳤다. 당시 제주에는 금은기(金銀器)들이 많았다. 금·은광(金銀鑛)이 없는 제주에 금은기(金銀器)들이 많았던 것은 원명(元明) 교체기에 유배 온 왕족들이 가져온 것들이었다.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미포(米布)를 가지고 제주의 민가에 있는 금은기들을 사가기도 했다.    

1388년 명나라 황제는 명나라가 북방을 정벌하였을 때 귀순한 타타르(達達)의 친왕(親王)과 80여 호에 달하는 그의 가족들을 탐라에 가 살기를 명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탐라에 자리 좋은 곳을 골라 이들이 살 집을 마련하라고 하니, 고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새집을 짓고, 헌집을 수리하여 85가호를 준비하였다.    ,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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