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광해군, 왕에서 죄인으로
제주목 망경루에서 4년간 귀양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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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목 망경루. 광해군은 이곳 서쪽에 위리안치 되었다. | ||
백성들이 업신여기는 최하위 통치자
「노자」에 "최선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차선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친밀감을 느끼며 칭찬하는 것이고, 그 아래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최하의 통치자는 아래 백성들이 그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하면, 곧 불신이 있게 된다.
법의 말을 잊게 되면 일을 이루고 공을 이룩하는데 백성들은 '나 스스로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큰 도가 없어지니 인의(仁義)가 있게 되었다…국가가 혼란하니 올곧은 신하가 있게 되었다."라고 했다.
노자는 말한다. 최고의 통치자는 무위(無爲)의 정치(政治)를 행하는 자이고, 두 번째로 훌륭한 통치자는 도덕의 정치를 펴는 것이며, 그 다음의 통치자는 법률로서 정치를 펴는 것이고, 최하위의 통치자는 오로지 형벌로 다스리며 공포 정치를 행하는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군주는 가장 나쁜 통치자이며, 법의 이름을 빌어 엄한 형벌을 동원하여 백성을 탄압하는 통치자는 결국 백성들로부터 축출당하는 정치적 운명을 겪게 된다. 백성들이 통치자를 함부로 대하게 된 것은 군주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광해군(1575~1641)은 폐주(廢主)이다. '권력은 화려하지만 무상하다'라는 말을 그에게서 배운다. 우리는 그를 일러 비운의 임금이라 부른다. 권력의 정상에서 있은 지 15년 만에 쿠데타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죄인이 된 광해군, 시리도록 푸른 바다로 둘러쳐진 제주섬 감옥에서 그는 죄인으로 오고, 그가 대역 죄인이라 하여 제주에 유폐시켰던 신하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과 간옹(艮翁) 이익(李瀷,1579~1624)은 쿠데타 덕분에 이미 사면되어 섬을 떠났다.
이 광해군의 역사적인 반전(反轉). 서자(庶子)의 아픔을 업고 살아온 광해군은 왕위를 위해서 아버지(선조)독살이라는 구설수에 올랐고, 왕권을 위해 형제들을 몰살시킨 역사적 사건은 조선 왕조의 내력과도 연관이 있다. 조선 왕조 시작부터 국가의 통치는 험난한 권력 투쟁의 길임을 예고한 것처럼, 태종이 그랬고, 세조가 그랬고, 광해군과 인조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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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등포. 18세기 지도. 광해군이 제주에 도착한 포구 | ||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덕을 본 인물이다. 조선 반도가 온통 왜군의 손아귀에 침탈당할 때 기개를 보인 광해군은 마침내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 선조의 정비(正妃)에게 후사(後嗣)가 없었고, 워낙 사태가 급박했던 만큼 선조는 도피한 평양성에서 대신들의 청에 따라 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었다. 당시 광해군에게는 형 임해군이 있었다.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민간에 피해를 자주 입혔기 때문에 군주로서는 적격이 아니었다. 세자가 된 광해군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분조(分朝)를 맡아 운영하였다. 그는 군사를 모집하고 왜적을 격퇴하면서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분조(分朝)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조정(朝廷)을 둘로 나누어 운영하여, 조정을 지키고 왕위를 보전하기 위한 조처를 말한다.
1600년 선조의 정비(正妃) 의인왕후가 죽고, 2년 뒤 새 중전 인목대비를 맞으면서 광해군의 지위는 좌불안석(坐不安席)이 되었다. 1606년 인목대비는 마침내 영창대군을 낳았고, 선조의 마음은 빠르게 적자(嫡子)에게 기울어 갔다.
영창대군에게 기울어가는 선조의 심정은 앞으로의 비극을 예고하는 것과 같았다. 광해군을 지지했던 북인이 다시 내부 분열이 일어나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와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소북파로 나뉘게 되었고, 그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면서 조정의 불안은 점점 커져갔다.
적자 영창대군의 등장은 광해군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서자라는 설움과 함께 다시 명나라 책봉도 받지 못한 세자로 낙인이 찍히면서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선조를 등에 업은 채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의 정치적인 공세는 왕위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광해군을 위협하였다.
조정은 전후 복구 사업을 뒤로하고 왕위 계승문제에 정력을 쏟았다. 젖도 떼지 않은 어린 영창대군을 내세워 이미 임진왜란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아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을 폐위한다는 유영경의 주장은 많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이런 유영경의 처신에 다시 소북파는 분열되었다. 선조가 숨을 거두기 전 홀로 들었던,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선조의 유시(諭示)를 숨겼던 유영경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 세자자리 다툼에서 패하고 말았다. 당시 광해군의 나이는 33세, 세자 자리에 16년이나 있었던 셈이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경제 정책을 먼저 실시하였다. 경기도 지역에서 먼저 대동법을 시범적으로 운영하였다. 대동법이란 많은 수의 공납품(貢納品)을 쌀로 단일화 한 세금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양반 지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시하였다.
또한 전란 때문에 버려진 땅을 재측량해 농경지를 확보케 하여 국가의 재정을 늘렸다. 그러나 왜침으로 소실된 왕궁을 복원하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크게 사기도 했다.
임진왜란에 소실된 서책을 재간행하였고,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케 하여 신토불이 민족의학의 맥을 집대성하게 하였다. 광해군의 외교는 매우 현실적이어서 동아시아 정세에 맞는 실리적인 처신으로 중국과 일본에 대응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폐주광해군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에는, '광해군의 이름(諱)은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공빈(恭嬪) 김씨가 낳았다. 15년 동안 보위에 있다가 폐위되어 강화에 유폐되었다가 이괄의 난(1624)으로 인해 태안(泰安)으로 잠시 옮겼다가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다. 병자년 겨울에 교동도(喬桐島)에 이송되었다가 정축년 2월에 제주로 옮겼다.
인조 9년에 죽었는데 향년 67세였다. 양주(楊洲) 적성동(赤城洞) 해좌(亥坐) 등성이에 장사지냈는데, 공빈의 무덤과는 '소울음 소리가 서로 들릴만한' 거리다.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 지는 26세 때 강화도에 보냈더니 땅길을 몰래 파고 나왔기에 사사(賜死)시켰다. 폐세자 빈(嬪) 박씨는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 고 전한다.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인조반정으로 하루아침에 죄인 신세가 된 광해군은 혼란무도(昏亂無道)·실정백출(失政百出)이라는 죄명아래 자신이 유폐시켰던 인목대비의 보복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노신(老臣)들의 만류로 간신히 목숨만은 보전하였다.
1637년 인조는 광해군을 다시 교동도에서 제주로 안치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광해군 자신만 모르는 목적지 제주, '어디로 가는지 모르도록 하라'는 인조의 엄명(嚴命)으로 배위 4면을 휘장으로 둘러막아 파도 소리만 귓전에 들리게 하였다.
몇 번의 고비를 넘겨 배가 멈춘 다음 호행(護行) 별장(別將) 이원로(李元老)가 도착지에 내리기를 청하여, 비로소 이곳이 제주라고 알리니 광해군은 깜짝 놀라며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라고 탄식을 하였다.
인조 5년(1637) 6월 6일 광해군은 어등포(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 내렸다. 제주 목사 이시방(李時昉)이 광해군을 맞이하여 문안하며 무릎을 꿇고 나아가 말하기를 "공자(公子)께서 임금으로 계실 때 간사하고 아첨한 자를 물리쳐 멀리하고, 환관과 궁첩들로 하여금 조정의 정사에 간여(干與)하지 못하게 했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오시겠습니까. 덕을 닦지 않으면 배 안에 탄 사람이 모두 적국(敵國)이라는 옛말을 모르시겠습니까?" 하니 광해군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광해군 일행은 어등포에서 1박하고 뒷날 제주목 망경루(望京樓) 서쪽에 마련된 안치소에 격리되었다. 광해군의 안치소에는 동오군(東伍軍) 30명이 배치되어 교대로 그를 지켰다.
이때 동행한 한 궁비(宮婢)는 광해군과 같이 위리안치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영감(광해군)이 일찍이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온갖 관청이 다달이 올려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염치없는 더러운 자들에게 반찬을 요구하여 심지어 김치판서(沈菜判書), 잡채판서(雜菜判書)란 말까지 있게 하였소…영감께서 사직을 받들지 못하여 국가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해놓고, 이 섬(제주)에 들어와서 도리어 나를 모시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속으로 부끄럽지 않소? 영감께서 왕위를 잃은 것은 스스로 취한 것이지마는 우리는 무슨 죄가 있어 이 가시덩굴 속에 갇혀 있단 말이오?"
위리안치란 격리(隔離)하고자 함이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격리란 외부의 세계, 범죄의 원인이 된 모든 것, 범죄를 용이하게 만든 공모관계로부터 수형자를 떼어놓는 격리, 수감자들 상호간의 격리이다.
형벌은 개별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개별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라고 하면서 그는 "고립은 적극적인 교정의 수단이 되어야 하며,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면 수형자는 반성하고, 자신의 범죄와 대면하여 혼자 있게 되면 그는 그것에 대한 증오를 배운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이 아직 악에 의해 무감각하게 되지 않았다면, 결국 후회가 찾아와 그의 영혼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격리상태에서인 것"이며, 그래서 '고립은 전적인 복종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했다.
1641년 7월 1일 광해군은 마침내 고립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제주에 유폐된 지 만 4년만의 일이다. 가장 무더운 날 상을 당하여 광해군의 시신이 변해가자 제주목사 이시방은 임의로 감옥 문을 박차고 수령들을 데리고 소복으로 조문을 한 후 염습과 입관을 마쳤다.
다시 감옥문을 닫고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죄를 청했으나 인조는 일 처리를 잘했다고 하여 오히려 이시방을 칭찬하였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