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중국 해상실크로드 통과 거점
'바깥 고려' 사람 난폭하다 인식 팽배

   
 
 

'메두사호의 뗏목' 제리코작.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물길의 주요지점에 닿는 표착

바다는 육지를 통해서 존재가 규명된다. 육지가 제공하는 만(灣), 섬, 해협, 정박지 등을 이용해 바다의 힘을 확인할 수가 있다. 대륙의 정복자들도 바다의 정복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징기스칸처럼 그렇게 염원하고 심혈을 기울였던 일본 정벌의 실패는 몽골 제국을 쇠락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바다를 정복하면 세계를 쉽게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른 것은 아니었다. 중세의 유럽 제국들은 바다에 눈을 돌려 물길을 열어놓고 노예와 특산물들을 약탈하여 자국을 부흥시켰다. 15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먼저 바다의 약탈자가 되었고, 16세기 네덜란드가 이에 가세하면서 바다는 점점 좁아졌다.

17세기 영국은 바다의 중요성을 깨닫고 도버 해협, 지브랄타, 수에즈 운하, 아텐, 오르뮤즈 해협, 싱가포르, 홍콩 등 주요 거점을 확보해 세계2차대전전까지 명실공히 바다의 여왕이 되었다.

육로에서의 길목처럼 바다에도 주요 지점은 꼭 있다. 그것이 육지의 만이 되었든, 바다 한 가운데 섬이 되었든, 물길에 유리하거나 타국의 진출에 유리한 주요지점이 있게 마련이다.

일본의 대륙 진출의 주요지점이 한반도인 것처럼, 중국 또한 일본 진출을 위해서 그 역이 성립되는 것과 같이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배가 많으면 표류도 많은 법이다. 바람은 순풍(順風)이었다가도 악풍(惡風)이 되기도 한다. 순풍은 항해에 이롭고 악풍은 항해에 해로워 조난사고로 이어진다. 그러기에 바다의 해양사(海洋史)는 항해의 역사와 표류의 역사를 동시에 껴안아야만 한다.

항해의 역사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기쁨과 영광의 역사라면, 표류의 역사는 슬픔과 아픔, 그리고 죽음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두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13세기 제주도는 일본과 송나라를 오가는 상인들이 수시로 왕래하는 섬이었다. 탐라가 고대 동아시아의 중요한 뱃길이었다는 사실은 몇 개의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가 있다.

929년 탐라도를 오가던 신라의 선박이 대마도에 표류하는가 하면, 1031년 일본에 표류했던 탐라인 8명이 귀환하기도 하였다. 1241년에는 성일국사(聖一國師) 일행이 송나라 명주 정해현(定海縣)을 출발해 일본으로 가다 탐라에 도착해 4일간 머무른 후 다시 하카다(博多)로 떠나기도 했다.

1344년 여문(如聞)이라는 일본 승려는 강남(江南)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탐라에 표착·억류되었을 때 고려인으로부터 고림청무(古林淸茂)의 어록(語錄)을 얻어 보고 베껴 갔다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송에서 탐라로, 탐라에서 송으로, 일본에서 탐라로, 탐라에서 일본으로 표착은 교차되었다. 제주가 중국의 해상실크로드 선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표류민' 프란츠폰지볼트 작.

 
 
우리는 제주인이 아니다

1687년 안남국(安南國;베트남) 회안부(會安府)에 표착한 김대황 일행은 자신이 제주도 사람이라고 밝히면 생사를 알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안남의 관리가 묻기를,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 제주인이 답하기를, "우리는 조선국 전라도 흥덕현 사람이오. 전라도 강진현에서 곡식을 팔고 고향에 가다가 표류하였소" 물론 이 말은 거짓이었다.

'동남쪽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탐라를 '바깥 고려'라고 부른다. 이 바깥 고려 사람들이 가장 사납고 악독하여, 여러 나라에서 왕래하는 장삿배들이 혹 땔나무나 먹을 물이 부족하거나 혹은 배의 기구를 잃어버려 이를 보충하고자 배를 해안가에 가까이 대려고 하면, 병사들을 출동시켜 이를 지키고 땔나무와 먹을 물을 얻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하여 해안에 가깝게 오지 못하게 한다.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그 탐라 사람을 만나면 죽여 버리지 않음이 없다.' 라는 말을 제주인들은 일찍이 일본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사람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문은 당시 바다를 낀 국제사회에 큰 여파를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인지 제주인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제주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애를 썼다. 이런 배경에는 몇 가지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고려 고종(1244) 2월, 제주 경내에 폭풍으로 인해 일본 상선이 난파되었다.

이 때 당시 제주 부사였던 노효정(盧孝貞)과 판관 이반(李班)은 일본 상선의 귀중품이 탐이 나 일본인들로부터 비단, 은, 주옥 등을 빼앗아 사욕(私慾)을 채웠다가 귀양 간 사건이 있었다.

충렬왕 18년(1326) 5월에도 일본 상선이 제주도 해안에 정박하자 탐라인들이 이 배에 화살을 쏘며 습격하여 그 중 2명을 사로잡아 서울로 압송하였다. 몽골에 이 사실을 보고했더니 세조가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또 충숙왕 13년(1326) 몽골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일본 상선이 제주도 해안에 좌초되었는데 땔감과 물을 구하려고 섬에 상륙했던 일본인 70명이 탐라인들의 습격을 받아 살상되었다. 몽골의 태정제(泰定帝, 1323~1328)는 배를 고쳐주고 살아남은 자에게 식량을 지급하여 일본으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유구국 태자의 살해 사건은 제주도를 공포의 섬으로 인식하게 만든 대 사건이었다.

1612년 제주목사 이기빈(李箕賓)과 판관 문희현(文希賢)은 제주 경내에 표착한 유구국 왕자 를 맞았다. 두 관리는, 처음에는 이들에게 대접을 잘 하다가 여러 날이 지나면서 배에 가득한 보화(寶貨)를 본 판관 문희현(文希賢)의 감언에 눈이 멀어 흑심을 품었다.

그들은 유구국 왕자 일행을 유인하여 죽이고 왕자의 재물을 취한 후 그가 타고 온 배를 불태워 증거를 멸실하였다. 이 때 유구국 왕자는 죽는 순간에도 안색에 변함이 없었고, 조용히 해를 당하여 듣는 사람이 오히려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두 관리는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서 거짓으로 왜구를 퇴치했다고 조정에 보고했고, 장교와 병졸들의 입을 막기 위해 재화를 나누어 주었으나 재물은 판관 문희현이 거의 차지하였다. 결국 이 사실은 발각되었고 두 관리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역사는 현실을 반영한다. 표착지의 관리는 표착인들의 생명을 보장해주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 잘 대접해 보내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었다. 왜냐하면 물길이 맞닿은 까닭에 외국인의 표착처럼 조선인과 제주인 또한 그곳에 표착하기 때문에 일종의 교린의 명목으로도 표착인에 대한 예우는 지켰다.

화물은 표착했을 때 그대로 물목을 작성하여 조정에 보고한 후 관리했고, 풍족하게 숙식을 제공했다. 표착인들이 돌아갈 때는 충분한 여비를 지급해 주었다. 또한 표류자들을 송환해 온 외국의 뱃사람들에게 표착자가 약속한 송환의 댓가를 지불하기도 했다.

그러나 표류자들에게 행한 살상 사건들은 제주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 후 17세기에 이르러 오랜 기간 억류되었던 하멜의 조선 탈출로 인해, 유럽 사회에 제주와 조선의 실체가 알려지면서 세계의 뱃사람들에게 제주는 악명 높은 섬으로 인식되었다.  
 
국제적인 네트워크 해상 실크로드

중국이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해상 실크로드'란 중국의 비단이 세계 각국에 전해지던 해상 교통로를 말한다. 물길은 육상과는 달리 전쟁이나 국경에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로웠다. 특히 중국의 동남 해안과 동부 해안 지역은 견직물, 도자기, 차와 같은 중국의 주력 수출 상품의 생산지이다.

이 지역은 일본과 조선의 항해가 가장 발달한 지역으로서 무역량을 대폭 늘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해상실크로드는 주(周)·진(秦)으로부터 당나라 이전까지는 형성기라고 한다.

일찍이 기원전부터 중국에는 동해(황해를 포함)와 남해로 향하는 실크로드가 존재했다. BC 219~210년, 진시황의 서복(徐福)을 동으로 파견할 때 동해 실크로드는 존재했다. 제주도 산지항과 금성리 패총유적에서 출토된 중국의 오수전(五銖錢), 화천(貨泉), 대천오십(大泉五十)은 해상실크로드의 실체를 증명하는 유물들이다.

특히 오수전(五銖錢)은 기원전 118년부터 주조가 시작되어 수(隋)나라 시대까지 제작되었고, 한국, 일본, 인도지나, 투르키스탄에 걸쳐 있는 국제적인 화폐였다.(국립제주박물관, 2001) AD 199년, 중국의 누에는 진시황의 후손에 의해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고, AD 238년 일본의 여왕 히미코는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예물을 바치자, 이때 위(魏)나라 명제(明帝)는 답례로 아름다운 비단을 주었는데, 이것이 일본에 중국 비단이 알려지게 된 최초의 일이었다. 중국 배들은 서쪽 비단길로 베트남, 미얀마, 인도까지 비단과 황금을 실어 날랐다.

당송(唐宋) 시기는 해상실크로드의 발전기에 해당한다. 당나라 때에는 백제, 신라, 일본과 해상 무역이 더욱 활발했다. 일본이 해상을 통해 당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한 횟수가 19차례나 되었고, 가장 많은 인원수의 사절단은 5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원(元) 명(明)시기는 해상 실크로드의 전성기로서 해상항로와 해외 무역의 발전은 역사상 최고조에 달했다.

정부에서 승인한 무역 말고도 밀무역이 성행하여, 1662년부터 1839년 사이에 일본의 항구를 이용한 중국의 비단 운송 선박은 6200척이나 되었다. 비단을 실은 배들은 중국의 천주(泉州)에서 출발하여 40여 국가와 지역으로 운송되었다.(朱建君, 2005)

중국의 해상실크로드는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국제적인 네트워크로서 경제적인 교류와 문화적인 전파의 길이 되었다. 바다 상인(海商)들과 토지 없는 농민들이 세계 각국으로 진출하면서 다민족의 정착 요인이 되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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