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잠녀를 만나다' -독도에 간 제주 잠녀 1

   
 
  ▲ 1950년대 독도에서 물질을 하던 김공자 할머니가 물개(학자들은 바다사자류 강치로 추정)를 안고 있다. 김 할머니가 50년 가까이 보관하던 사진이지만 지금은 김 할머니의 손을 떠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협재 김공자 할머니…꽃다운 19살 생계 위해 발동선 몸 실어
일제 1921년 강제노역 기록도 확인, 독도 바다 '산증인' 확인

바다가 있고, 물건만 있다면.

‘생계를 위해’ 우리네 어머니들의 선택은 오직 하나였다.

조금이라도 더 돈벌이가 된다면 먼 바닷길도, 처음 접하는 물 속도 무섭지 않았다.

바깥물질은 바다와 맞닿은 국내는 물론 일본과 멀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계속됐다. 심지어 멀리 쿠바까지 흘러가 정착한 사람들 중에 ‘물질’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새터민들의 입에서도 ‘해녀’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녀들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그래서 바깥물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몇 남지 않은 잠녀들로부터 시작된다.


#강제노역의 우울한 기억

지난 2007년 한 교수가 공개한 문서가 제주 잠녀들의 묵은 상처를 들췄다.

일제강점기 제주해녀들이 목숨을 바치고 채취한 해산물이 부당하게 착취 당한 것도 모자라 일부는 독도로까지 끌려가 강제노역을 한 사실이 일본에 보관중이던 서류를 통해 확인됐다.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가 일본 시네마현에서 제출받은 ‘다케시마 관계철’에는 일제는 1921년부터 조선인을 독도로 끌고 가 전복과 소라 등을 따도록 했으며, 1941년에는 제주도에서 해녀 16명을 데려가 일을 시켰고 주로 성게를 채취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들어있다.

‘제주 잠녀가 독도까지 같다’는 말을 확인할 수 있는 오래된 서류상 기록이 ‘강제노역’이었다는 사실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당시 일제가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여겼기 때문에 조선인에게는 어업권을 주지 않았고,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했으며 수탈정책의 일환으로 제주해녀를 ‘먼 곳’까지 끌고 가 고된 노역을 시켰던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 김 교수의 분석.

강제노동에 따른 보상이나 수입 등은 문서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고, 당시 독도 사정을 감안하면 탄광 등에서 일하는 것 이상의 고통에 시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비슷한 시기 독도에서 히사미(久見) 어업조합을 운영했던 야하다 사이다로가 쓴 ‘다케시마 일지’와 관계 서류에 따르면 독도에는 3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는 우물이 있었고, 강제노동자들의 숙소로 추정되는 막사 2채가 있었다.

   
 
   
 
#돈 벌기 위해 바다 건너다

동해 바다 외딴 섬 독도에서도 삶을 위한 잠녀들의 자맥질이며 숨비소리가 낯설지 않다.

50여년 전 독도에서 물질을 했던 기억은 김공자 할머니(제주시 한림읍 협재리)에게 아직도 생생했다.

“처음에야 돈을 벌기 위해 울릉도에 들어갔었지. 그때도 다른 지역 사람은 미역도 조물지(채취하지) 못하게 해서 눈칫밥을 많이 먹었어”

김 할머니의 독도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김 할머니가 처음 독도에 들어간 것은 지난 1958년쯤. 세상을 잘 모를 19살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발동기에 몸을 실었다.

독도 작업은 그나마 먼저 울릉도에 자리를 잡은 사촌 언니가 있어 가능했다.

김 할머니는 “사람이라고 누가 살기나 하나, 두렵기는 했지만 대신 독도 바당에는 사람이 없어 아무나 작업할 수 있었다”며 “‘단물’이 있는 서도에 머물면서 동도까지 미역을 하러 다니곤 했다”고 말했다.

해마다 미역철인 3월에 들어가 5월까지 석 달 정도 살고, 겨울철에도 해삼과 천초를 얻기 위해 한두 달 정도 살면서 작업했다.

먹을 것이라곤 독도에 들어갈 때 조금 챙겨둔 보리쌀이 전부. 바닷가에 지천이던 갈매기알을 삶아 요기를 하고 울릉도에서 수급한 감자로 연명했다. 그나마 날이 좋을 때나 그렇지 파도가 조금이라도 거센 날이면 숙소로 이용하던 굴 속 가마니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시작한 독도 이야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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