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인 1687년에 베트남 표류 중국 선박타고 무사귀환
'이신' 이옹중이라 불려…완옹중과 동일인물로 추정돼

   
 
 

베트남 구엔왕조의 유적

 
 

아시아, 아스바에서 유래

유럽인들은 일찍부터 '동방(東方)'이라는 지리적 개념을 사용했다. 이런 관념은 후에 아시아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원래 아시아란 말의 어원은 앗시리아 말로 '일출'을 뜻하는 'assu'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1235년경에 흑해에서 바빌로니아까지 지배하던 히타이트(Hittite)왕이 에게 해의 동쪽에 있는 '앗수바(Assuva) 부족' 연합을 정복한 적이 있는데, 이 때 'Assuva'는 '일출'을 뜻하는 'assu'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측한다.

그 후 그리스인들이 에게해 동쪽에 있는 거대한 대륙을 '동쪽 지역'이라는 뜻의 '아스바(As<e>va)'로 부르게 되었다. 근대에 와서 서양인들의 식민지 침탈 대상이 된 이 '동쪽 지역'을 그리스인들이 불렀던 '아스바(Assuva)'와 비슷한 음인 '아시아(Asia)'란 관용어로 정착하게 되었다.

다시 아시아를 세분하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제1차 세계대전전까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졌던 대영제국을 기점으로 한 원근(遠近)에 따라 근동(近東, the Near East), 중동(中東, the Middle East), 극동(極東, the Far East)으로 나누게 되었다(정수일, 2002).

이런 생각은 순전히 유럽중심주의적인 지리적 관념에 의거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한국을 중심으로, 중국, 일본 등을 포함한 지역을 '동아시아'라고 부른다.

즉 '동아시아'란 아시아의 동부지역을 지칭하는 지리학적 개념이다. 이 동아시아는 동쪽은 태평양, 남쪽은 남중국해(南中國海), 서쪽은 아무르강 남안(南岸)의 대흥안령(大興安領)으로부터 중국 본토의 서쪽 경계지역을 통과하여, 베트남의 국경 근처에 이르는 경계지역까지라고 말할 수 있다(동아시아고대학회편, 2007).

동남아시아는 아시아대륙과 오세아니아를 잇는 교량지대로서 동쪽으로는 태평양, 서쪽으로는 인도양이 열려 있어 일찍부터 서양 세력이 눈독을 들였던 곳이었다.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베트남의 최초의 국가는 반랑(Van Lang, 文郞)국이다. 반랑국의 건국신화에 의하면, 18대에 2621년동안에 왕조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현실적으로 믿기 어려운 신화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하면, 반랑국의 존재는 실제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그 이론적인 바탕을 동 선(縣)(Dong son) 문화에 두고 있다.

동 선 문화는 기원전 2350±100년으로 추정되며, 타잉 호아성(省) 동 선(縣)에서 발견되었다. 이 동 선 문화는 청동기 말기와 철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다(송정남, 2001). 

오늘날의 베트남이라는 말은 19세기 응우옌왕조 때 생겼다. 이 왕조를 세운 자롱은 1803년 청나라에 베트남의 국호(國號)를 '남월(南越)', 즉 '남 비엣(Nam Viet)'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자 요청했으나 청나라는 '남월'이라는 명칭이 현재 중국 광동(廣東), 광서(廣西)에서 베트남 북부에 걸쳐 지배했던 기원전의 '남월국(南越國)'을 연상할 수 있다고 하여 국호로 승인하지 않았다.

이듬해 자롱은 청나라와 최종교섭에서 '남(南)과 월(越)'을 거꾸로 한 '월남(越南)'이라는 이름의 '베트남'을 국호로 할 수 있었고, 그 이름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베트남의 전신(前身)이 되는 국가가 중국으로부터 자립을 이룬 것은 10세기경이다.

이때의 국가는 유교와 과거제도에 의해 유지되는 '중국적인 국가'가 아닌, 왕의 계승 규칙도 없이 오로지 왕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해 유지되는 동남아시아다운 국가였다.

10세기 이후 중국을 통일한 당(唐), 송(宋), 원(元) 등은 차례로 군사적인 정벌을 시도했지만 베트남은 이에 당당히 맞서왔다. 그러나 중국이 잦은  군사적 공격으로 베트남의 국가적 존립이 위협을 받자 중국을 탈피하기 위한 중국화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의 자주 의식은 11세기에 싹이 트는 데, 중국과의 책봉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아오 치 군왕(Giao Chi Quan Vuong, 交趾郡王), 또는 안남 국왕(An Nan Quoc Vuong, 安南國王)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베트남의 지배자는 스스로 자국 내에서는 황제라 칭하였다.

국호도 중국에서 받은 이름 외에 '다이 비엣(Dai Viet, 大越)'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왕을 '남제(南帝)'라고 불러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표현하였다(古田元夫, 2008). 베트남은 15세기에 초에 20년 정도 명(明)나라 지배에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받기 전까지 독립 국가를 유지해왔다.

전통적인 베트남 국가의 구성원은 오늘날 다민족과 그 다수 민족은 킨(Kihn, 京)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인에 대한 기원은 정설이 없고, 몽·크메르적인 요소와 타이 요소가 섞여 베트남인의 선조를 이루었다고 한다.     

   
 

 

옹중석이라 불렀던 돌하르방

 
 
조선은 베트남을 어떻게 보았을까

300여년전 「남환박물(南宦搏物)」에, '제주에서 안남국(安南國)까지의 거리는 정남서(正南西)로 1만 7000여리라고 했다. 일찍이 최치원(崔致遠, 557~ ?)은 안남국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어떤 이는 머리를 풀어 흩뜨리고, 몸에는 문신을 새긴다.

또 어떤 이는 가슴을 뚫기도 하고, 이(齒)를 파내기도 한다…표범의 가죽으로 몸을 싸서 거북의 껍질로 형체를 가리며, 물솜을 두들겨서 겉옷을 만들고 대껍질을 엮어서 날개를 만든다"고 했다.

또 "아이를 낳아 기를 때는 남편과 아내가 번갈아 가며 보살피고, 자라난 뒤에는 아비와 자식이 주도권을 겨룬다"고 한다. 풍속은 "누에를 기르는 일이 없고, 다만 여러 가지 무늬를 놓은 좁은 베를 짜며, 기장이 짧은 얼룩무늬 옷을 많이 입는다. 더러는 꿰매지 않고 입기도 하고 더러는 낱알이 아닌 것도 먹고, 죽어서 초상을 치러도 상복을 입지 아니하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도 중매가 없고, 싸우는 데는 칼을 쓰며 병들어도 약을 쓸 줄 모른다"고 했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도 "안남(安南)은 옛 교지(交趾)로서 날씨가 따뜻하여 서리와 눈을 보지 못한다. 남녀가 다 이빨을 물들이며, 남자는 정수리에 삭발한다. 토산물로는 철도목(鐵刀木), 빈랑, 야자주(椰子酒), 육계(肉桂) 등이 나고, 본디 형제의 나라였는데 자손들이 다투어 교지와 동경(東京), 두 나라로 나뉘었다"고 했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안남국에 다녀온 완벽(完璧)이라는 선비의 이야기가 있다.  그 선비는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사람으로, 장사하는 왜인을 따라 세 번이나 베트남을 다녀왔다.

일본에서 안남까지는 3만 7000리, 사쓰마(薩摩)에서 배를 타고 주야로 5~60일 거리이고, 그곳은 따뜻하여 논에 곡식을 심는 데에 철이 없다. 한 쪽에서 곡식을 심고 한쪽에서는 곡식을 거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항상 빈랑을 먹고 목이 마르면, 사탕수수를 씹는다. 그들은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120세 된 사람도 있고, 머리털은 희었다가 다시 누렇게 된다고 한다.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에, 제주 조천관 주민 고상영이라는 사람이 안남국에 표류한 내용이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지영록(知瀛錄)」에 <김대황(金大璜) 표해일록>이라는 제하로 실려 있다. 1687년 9월초 3일 조천관 주민 17세 고상영은 해남 대둔사에 가서 그곳 승려에게 글을 배우려고 제주진무(鎭撫) 김대황과 같이 진상마 3필을 실은 진상선을 탔다.

배가 추자도를 지나자마자 표류하여 망망대해에서 29일 만에 안남국에 이르렀다가 운이 좋아 중국 상인의 선박을 타고 1688년 12월16일 제주에 돌아올 수 있었다.

14세기 후반에 편찬된 베트남의 「영남척괴열전」에는 '옹중(翁仲)'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교지국(베트남)에 이신(李身)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장대하여 그의 키가 2장(丈) 3척(尺)이나 되었다. 그는 날래고 사나웠는데 살인죄를 저질러 사형이 언도되었다. 웅왕은 그를 애석히 여겨 차마 죽이지를 못했다.

안양왕때 진시황이 베트남을 침략하려 하자 안양왕은 이신(李身)을 진시황에게 바쳤다. 진시황은 이신을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여 무관(武官)에 임명했다. 마침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이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임조(臨?)를 지키게 했다. 그러자 북방의 흉노는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못했다. 진시황은 이신을 제후로 삼아 베트남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 후 흉노가 빈번히 변방을 침범하자 진시황은 이신을 불러오게 했으나 이신은 갈 뜻이 없어서 마을의 구석진 곳에 숨었다. 안양왕은 중국의 사신들에게 책망을 듣고 이신을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중국 사신들에게 이신은 설사병이 나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진나라에 이신의 시신을 보내라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신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안양왕은 이신의 시신에 수은을 발라 진나라에 보냈다. 진시황은 탄식을 한 후 구리를 녹여 이신의 동상을 만들어 이름을 '옹중(翁仲)이라고 하여 함양궁 사마문(司馬門) 밖에 세웠다. 그리고 동상의 배 속에 수십 명의 사람을 넣어 매번 사방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몰래 동상을 흔들거리게 했다. 이의 소문이 나면서 이신이 살아있는 줄 안 흉노는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못했다.

베트남에서는 이신을 가리켜 '이옹중'이라고 한다. 중국과 한국의 옹중에 관한 이야기로는 '완옹중(完翁仲)' 대한 이야기가 있다. 특히 이익(李瀷, 1681~1763)의 "완옹중(完翁仲)은 안남(安南) 사람으로 키는 2장 3척이나 되고 기품은 단정하면서 씩씩하여 보통 사람과 아주 달랐다...진시황이 완옹중에게 병권을 맡겨 임조를 지키게 했고, 죽은 후에는 동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말은 사서(史書)에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사실로 미루어, 완옹중은 성씨만 다른 베트남에서 전해오는 이옹중과 동일 인물임을 알 수가 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