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인 일본에 표착…귤·유자 열려
제주해역서 표류시 규수 섬에 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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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업개 1890년대 | ||
조선 사람들이 모여사는 옹점(壅店) 마을
정운경(鄭運經, 1699~1753)이 채록한 제주사람의 일본 표류기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관노(官奴) 우빈(友彬)이 표착한 곳은 일본의 취방도(翠芳島)였다. 산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폈더니 섬 둘레는 고작 20~30리에 지나지 않았고, 잡목이 울창하여 겨울이지만 늘 푸르렀다.
흙은 검은 빛이었고, 돌은 모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표착 후 4개월이 지난 1680년 2월, 표류자들을 '나가사키(長崎島)로 호송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하여, 같은 달 12일 구지도(九智島)에 이를 수 있었다. 구지도에서 밭을 가는 것을 보았다.
짧은 쟁기를 가지고 흙 표면만 뒤집을 뿐 깊게 갈지를 않았다. 지반에는 큰 돌이 많고 흙의 성질이 가볍고, 바짝 말랐기 때문이었다. 관노 우빈 일행이 본 표착지 사람들은 검은 옷에 칼 두 자루씩 찬 사무라이였고, 그들은 친절하게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곡식과 채소, 방어젓을 주었다.
섬의 토질은 화산회토와 현무암이었으며, 밭농사 방법은 작은 쟁기를 쓰고 있었지만 땅을 깊게 갈지는 않았다. 한눈에 화산섬의 지질 조건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4월에 표착자들은 사쓰마(薩摩州)의 산천포(山川浦)라는 곳에 이르니,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통사의 할아버지는 원래 경상도 사람이었다. 임진년에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와 한 곳에서 함께 살았다.
그러나 왜인들은 그들이 도망 갈까봐 멀리 나가서 장사를 못하게 하고, 도자기 만드는 일만 허락하여 먹고 살게 했다. 마을 이름은 '옹점(壅店)'. 할아버지, 아들, 손자 등 3대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으나 일본법(倭法) 때문에 그렇지를 못하였다.
조선 사람들이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선말을 잊지 않은 것은 온 마을이 그것을 전수했기 때문이었고, 제사 때에는 조선의 옷을 입고, 평소에는 망건과 상투, 패랭이를 하여 조선의 습속을 버리지 않았고, 일본(倭)도 이를 금하지 않았다.
학자마다 다르지만,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된 조선 사람은 최소 2만 명에서 최대 10만 명이라는 숫자를 거론한다. 혹자는 도자기 제조 기술이 당시 최고의 산업 기술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그 기술을 탐하여 도공들을 집중적으로 잡아갔다고 하여 '임진왜란=도자기 전쟁'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임진왜란 후 포로들의 자취는 일본 곳곳에 배어있다.
1682년 일본 통신사 사절로 다녀온 김지남은, '배에 내려 식사 대접을 받는 데 숟가락과 젓가락이 조선에서 만든 것과 흡사하여 물어보았더니 조선의 포로들이 히라가타(平方) 지역에 많이 살기 때문'이라고 했고, 1719년 사절로 다녀온 신유한은 '야마시로슈(山城州) 요도죠(淀城) 요도코(淀江) 언덕에 진주도(晋州島)라고 부르는 곳은 임진왜란 때 진주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와서 거주케 한 곳으로 지금도 다른 성씨가 이 마을에는 없다' 고 했다.
또 18세기 후반 일본 곳곳에서 수염과 머리를 깎지 않는 무리를 볼 수가 있었는데 어떤 마을에서는 양반이라고 자처하며 다니고, 혹은 다른 마을에서는 거사(居士)나 무격(巫覡)의 무리라 하여 명나라와 조선의 후예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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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사무라이 19세기말 | ||
숙종 24년(1698) 11월29일, 제주성안에 사는 백성 강두추(姜斗樞)와 고수경(高守慶)은 진상선을 타고 추자도를 지나다 일본 옥구도(屋鳩島)에 표류하여, 머리를 밀고 검은 옷을 입은 왜인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표착한 배를 옮길 때 표류자들이 합창으로 제주의 노래를 불렀더니 옥구도 왜인들이 좋아했다. 한 겨울인데도 기후는 따뜻했고, 온 땅에 귤과 유자가 가득했다.
표류자들에게 준 쌀은 매우 거칠었는데 옥구도에는 쌀이 나지 않아 류큐(琉球)에서 사오기 때문이었다. 왜인들은 옥구도에서 류큐까지의 거리는 바닷길로 하루 반이고 일본 본토보다는 조금 가깝다고 했다.
강두추(姜斗樞)와 고수경(高守慶) 일행이 1699년 정월 초 5일에 사쓰마(薩摩州) 산천포(山川浦)에 도착하여 들은 것은 임진년에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쓰마(薩摩州) 산천포(山川浦)에는 부산의 왜관(倭館)과 마찬가지로 류큐(琉球)의 관사(館舍)가 있어서 일본과 서로 교통하는 곳이다.
표류자들은 아침에 행하는 젊은 여자의 의례를 보았다.
날마다 해가 떠오르면 어떤 젊은 여자가 대나무 가지를 꺾어 표주박을 들고 포구로 온다. 표주박의 물로 댓잎을 적시고는 해를 향해 가볍게 뿌리면서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편이 먼 곳에 장사를 가 돌아오지 않자 남편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이었다.
표류자들은 다시 나가사키로 이동하여 관소(館所)에 머물렀다. 왜(倭)의 법이 대마도의 조선 통사 한사람을 교대로 나가사키에 번을 세우고 있다가 만약에 조선 사람이 표류해 오면, 그들을 접대케 하고 있었다. 대마도에서는 단오 행사를 볼 수가 있었다.
단오날 아침이 되면 집집마다 문 앞에 숫자를 달리하여 채색한 깃발과 창을 세워 놓았다. 아들이 한 명 있는 사람은 깃발과 창을 하나씩, 아들이 여럿 있는 사람은 아들의 숫자만큼 깃발과 창을 세웠다. 자식이 복을 받고 장수하라는 기원의 징표였다. 단오날 남녀들은 아름다운 채색 옷을 입고 거리에 나오는데, 볕이 나지 않아도, 혹은 비가 오지 않아도 우산을 접지 않았다.
강두추(姜斗樞)와 고수경(高守慶) 일행의 귀향 경로를 살펴보면, 1698년 11월29일 추자도 근방에서 표류 - 12월 초 8일 옥구도 표착 - 1699년 정월 초 5일 사쓰마(薩摩州) 산천포(山川浦) - 2월 10일에 살마(薩麻) - 3월 초 5일 나가사키(長崎島) - 40여일 후 이키(一岐島), 대마도 - 4월 16일 부산 동래에 이르렀다.
경종 3년(1723년) 3월 25일 제주성에 사는 백성 김시위(金時位)가 육지에서 제주에 오다가 일본 고토(五島)에 표류하여 6일간 체류하다가, 나가사키(長崎島)로 이동하여 관소(館所)에 머물렀다. 그는 통사의 도움으로 그곳의 남만관(南蠻館, 네덜란드 商館)을 볼 수가 있었다.
남만인들의 키는 한 장(丈) 반이나 되고 손가락은 정강이만 했다. 머리에는 붉은 담요를 둘렀는데 북방 오랑캐들이 쓰는 모자와 같았다. 누린내가 나는데 50보 떨어진 거리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남만인들은 일본과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볼모로 3년에 한 번씩 교체된다고 들었다.
또 과거 한때 남만인들이 제주도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일본의 관백이 이를 허락지 않아 그만두었다는 말도 들었다. 나가사키에서 김시위는 자신보다 조금 늦게 표류한 제주도 조천사람 이기득을 만날 수 있었다. 이기득 또한 벌써 김시위 등 25인이 수십일 째 대접받고 있었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제주사람'이라고 하면 악명 높은 섬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까봐 이기득은 표착시 전라도 나주(羅州) 사람이라고 했고, 김시위는 전라도 영광(靈光)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시위는 표류 3개월 만에 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동래로 왔고, 이기득은 표류 5개월 만에 대마도를 거쳐 거제도에 정박할 수 있었다. 김시위가 제주도에 돌아와 보니 이미 가족들은 자신이 물귀신이 된 줄 알고 장례를 치른 상복을 입고 있었다.
겨울철에 집중되는 표류
임진왜란 이후 19세기 말까지 273년(1599~1872) 동안 발생한 표류민들의 숫자는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이 1만 명에 가까웠고, 건수로는 967건에 이른다. 반대로 일본인이 조선에 표착하여 송환된 수는 1050명으로 114건이었다. 표착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어부나 상인 등 민간인이 많았고,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들은 신분적으로 노비나 양인이 많았다.(한일관계사학회 2006)
정운경(鄭運經, 1699~1753)의 「탐라문견록」에 실린 표류 14건 가운데 표류한 달을 살펴보면, 8월(2건), 9월(2건), 11월(2건), 12월(1건), 1월(1건), 2월(3건), 3월(1건), 4월(1건) 이었고, 승선의 목적은 장사(7건), 진상(3건) 공무역(1건), 유배(1건), 귀로(2건) 등이었다.
표착지는 안남(베트남, 1건), 대만(2건), 일본(취방도, 옥구도, 수라도, 대마도, 상촌, 살마, 고토, 비전 등 9건), 유구(1건), 조선 국내(1건)이며, 표착지에서 귀환한 시일은 조선 국내인 경우 10일, 안남 15개월 10일, 대만은 9개월 2일, 일본인 경우 4개월에서 6개월이 소요되었다. 유구에서 동아오는 데는 26개월 9일이 걸렸다.
표류가 많이 발생하는 달은 당연히 태풍이 부는 달임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제주도인 경우 음력 2월은 영등달이라 하여 바람이 가장 많이 부는데 이때 배의 운항을 자제하거나 중지하여 봄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배를 띄울 수가 있었다.
표류의 빈도수는 태풍이 끝나지 않은 8월에서 영등 달인 2월까지가 집중되어 있다. 특히 겨울철 표류 사고는 겨울에 동해상에 불어 닥치는 북북서풍 때문에 일어난다. 전라도 해역에서 표류한 경우 대마도 남부와 고토(五島)에, 추자도, 사서도 등 제주해역에서 표류가 일어날 경우 규슈(九州)의 섬에 표착하게 된다.
일본에 표착한 사람들이 왜인들에 의해 구조가 되면, 그들로부터 우호적으로 보호받았고, 1640년대 후반의 도쿠가와 막부(幕府)의 송환 절차에 따라 모두 나가사키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규칙대로 대접을 받고는 대마도를 통해 조선의 동래로 송환되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