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영·소설가>

  '너였구나, 새벽잠을 설치고 댓바람에 운동화를 구겨 신게 만든 이가.......'

 유채꽃 아우러진 동네를 산책하다 어느 틈에 신록을 일궈낸 청보리들을 만난다. 누렇게 마른 초목 덤불을 비집고 일어서는 꼿꼿한 기세. 태산보다 높은 보릿고개를 넘는 이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첫 양식. 봄을 주름잡는 목련, 개나리, 진달래들의 화려한 자태가 있음에도 밋밋한 보리의 푸르름이 시선을 붙잡는다.

 꼭 이맘때였을 것이다. 첫 미팅에서 만난 이들과 소풍을 갔던 때가. 야트막한 돌담 아래 앉아 도시락을 나눠먹고 누군가의 진행으로 한 명씩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자리가 파해질 무렵, 그때까지 별로 눈에 띄지 않던 한 아이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쓰러질듯 전신을 바르르 떠는 모습이 안쓰러워 안 불러도 그만일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오를 무렵, 마치 선풍기 날개 돌아가듯 떨리는 아이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누군가처럼 기타를 퉁기며 부르는 발랄한 포크송도, 유명 아티스트를 흉내 낸 팝송도 아닌 어느 시절 수업시간에 잠시 부르고 지났던 노래를 아이는 끊어질 듯 한 목소리로 2절까지 불렀다. 아이의 멋없음에 키득키득 소리죽여 웃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푸른 파도 일렁이는 보리밭을 등지고 서서 부르는 아이의 '보리밭' 노래가 더 없이 순수하고 진실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날 다른 이들이 불렀던 노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아이의 노래는 17년이 지난 지금도 계절이 돌아오는 순리처럼 봄이 되면 떠오른다. 기교가 빼어나지도 가창력이 특출하지도 않은 아이의 서툰 노래가 보리밭을 지날 때면 흥얼흥얼 바람처럼 들려온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언제 스며드는 지 모르다 흠뻑 젖어 버리게 만드는 기억의 조각들. 보리밭에서 '보리밭'을 노래하는 일이 당연하다 싶겠지만, 요즘 아름답고 깨끗한 봄꽃들의 축제에서 꽃들의 모습은 외면하고, 애먼 여인네들의 깊은 속살을 들여다보려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계절을 즐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느낀다.

 넘치지 말자. 봄은 봄으로 즐기고, 꽃은 꽃으로만 바라보고, 보리밭에서는 보리를 노래하고, 사과상자엔 사과만 담으려 하자. 십 수 년 동안 아이의 순수한 봄노래가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었듯이 이번 봄에는 좋은 추억들만 남길 수 있었으면 한다.   <양혜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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