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원로 서양화가 장리석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 고향은 풍화하지 않는 것일까. 돌아갈 수 없는 고향 평양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노화가가 90을 바라보며 결단을 했다. 정녕 갈 수 없다면, 갈 곳 없던 젊은 화가의 풍파를 받아주었던 그 섬으로 가버리자고. 마음의 고향, 제2의 고향이면 어떠랴. 몸도 그림도 뉘이고 싶었다. 한국구상미술계의 거목이자 살아있는 근현대사 장리석 화백. 평생 품고 살았던 자식같던 그림들 112점은 그렇게 제주도에 왔다. 제주화단은 물론 한국화단이 놀란 사건이었다. 이제 6월이면 그 그림들을 만난다. 제주도립미술관내 장리석기념관에서. 지금도 붓을 잡고 있는 94세의 현역 장리석 화백. 서울 동부이촌동, 그의 거실엔 요즘 마무리한 목련화가 화면 속에서 환하게 피어 있었다. 노화가의 열정은 구수한 평양 언사에서도 묻어난다. 그의 삶과 제주도를 듣는 동안 날은 저물었다.

  # 제주의 잠녀들, 그녀들에게서 받은 생명력

   
 
 

서양화가 장리석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났고 개인전, 목우회전 등 수많은 그룹전, 초대전에 참여했다. 1936년 최영림 황유엽 박수근과 미술단체 '주호(珠壺)' 를 결성. 1951년 제주도 피난시절 이후 1955년부터 제4회 국전서 그가 아끼는 '조롱과 노인'특선 후 1960년까지 네 차례 특선. 1958년 '그늘속의 노인'으로 제7회 국전 대통령상 수상. 1981년 정년퇴임 때까지 중앙대 예술대학 교수, 2004년 '이동훈미술상' 수상.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역임. 200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2005년 제주도에 자신이 소장해온 110점과 화구를 기증하기로 하고 협약서 체결. 제주도립미술관 내 장리석 기념관에 그의 작품을 영구 전시하게 됐다.

 
 
"평양에 있을 적에는 모란봉이다 뭐다 숱하게 보다보니 색다른 맛이 없었는데 제주에 피난가서 보니까 안그래. 피난 화가 중에 아마 한라산 그린 사람은 나밖에 없을거야. 누구보다도 제주도 화가들이 한라산을 멋있게 그려야해. "

타히티로 떠난 폴 고갱은 그 섬의 원초적 야성을 지닌 여인들을 그렸다. 1950년대 절박한 영혼으로 떠나온 장리석은 피난지 제주섬에서 섬의 여인들과 풍광을 그렸다. 용암이 분출한 섬답게 섬의 생명력은 꿈틀거렸다. 젊은 화가 장리석, 그는 겁도 없이 그 여인들 앞에서 붓을 들었다. 물질에서 나와 불턱에서 몸을 말리고 있던 제주 잠녀들, 본능적으로 이 무례한 화가를 향해 질타를 퍼부었다. "돌을 자꾸만 던지는거야."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멀리 쫓겨난 화가는 그들의 모습을 훔쳐보며 화면으로 불러냈다. 물옷을 입은 젊거나 늙은 그녀들, 머리를 말리거나 젖을 먹이거나, 드러눕고 있는 그녀들. 제주바람을 담은 여인의 치맛자락이 펄럭인다. 굵고 몽툭한 다리, 풍만한 가슴, 소라나팔 부는 이,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긴 스토리가 이어지고 음악이 흐른다. 그의 제주해녀들은 굵다. 실물보다 과장된다.

"말하자면 제주해녀들은 자연과 자기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야.  강인한 정신으로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다 씩씩하잖아. 저 거친 바다와 싸움을 벌여야하니까. 실물대로 그리면 너무 빈약해. 그래서 가슴도 더 크게, 아기가 젖을 먹어도 사흘을 먹을 수 있을만큼. 실제 그대로 그리면 재미가 없잖아. 테왁이 재미가 나. 이것을 물 속에 띄워놓고 들어갔다 나왔다해. 이런 물건 하나 있으면 공간 변화를 주기에 좋거든. 큰 얘깃거리야. 나는 인물이나 자연이나 거기에다 3~4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넣어. 그래야 남과 같지 않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거야." 그가 조랑말 가족을 그린 '망향'을 보여준다.

"내 자신의 한탄을 표현한 거야. 수평선 넘어 가고 싶은 내 하소연이지. 옛날에 제주에 있을 때는 잘 먹이지 못해서 말들이 말라서 다 갈비뼈가 나와. 그게 명암이 잘 나와. 요즘엔 너무 잘먹여서 말의 기분이 안 나와."그의 화폭에 담긴 것은 두고 온 고향이며, 그들의 원초적 생명력이다. 우수어린 화가 자신의 내면 풍경이다.

 # 모슬포에서의 피난시절 향토색 짙은 그림 그려

   
 
     
 
초등학교 도화시간엔 1, 2등을 도맡았다. 허나 산수나 다른 시간에는 모두 매를 맞던 소년이었다. "계산을 해야 하는 시험인데 극장에 가서 영화 보았던 생각만 나는거야. 사무라이 누구다 등등하면서 검술장면을 1번, 2번문제에 그려 넣었어. 선생이 뒤에서 막 때려. 그러니까 다른 건 제로지. 그렇게 하면서 왜놈시대에 학굘 다녔어." 의사 집안 아들이었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그 고향 평양에 아내와 어린 아들과 딸을 두고 왔다.

그 시기의 누구들처럼 한국전쟁은 서른넷의 청년화가 장리석의 삶과 그림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북한 노동성에서 건립중이던 금강산호텔의 벽면 장식 작품에 동원되면서. 원산서 기지사령부에 입대했다. 부산에서 이틀 밤 자고 물건 살거 사고해서 가고싶은 사람은 타라해서 건너온 땅. 작은 섬, 사방 400리. 제주도였다.

피난지에서 황해도 출신 여인과 재혼했다. 도너츠집 딸. 제주시 칠성로 해군정훈실 미술책임자로 그림 활동을 하다 모슬포 훈련소근처로 정착했다. 도너츠 장사를 했다. 가게엔 수채화 작품들을 걸어놓았다. "훈련소 사람들이 도너츠를 잘 먹거든.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서 도너츠 먹다가 그림을 봐. 관공서 서류 종이 많이 사서 풀칠해서 그렸어. 그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도너츠와 단팥죽을 그냥 내주었어. 하루에 100개만 팔면 생활하고도 남거든. 100개 빚어주고는 나는 바다로 나가서 그림을 그리는거야."

모슬포의 한 사찰 스님이 탱화를 부탁해서 석 점을 그려주기도 했다. "나중에 비가 새서 탱화는 못쓰게 됐어. 그때 부처님 조성할 때 내가 걸려고 했던 관음보살부각상도 제주도에 기증했어. 저게 큰 보물이야."

# 이중섭, 최영림과 만나 망향 달래

   
 
     
 
"이중섭, 그 사람 진짜 예술가야. 만나면 술 좋아해서 자꾸 한잔하고 그랬어. 말은 별로 없고. 최영림과 한번 놀러갔댔어. 며칠간 재워줄까하고. 평양에서 그가 오면 내 집에서 재워주고 그랬어." 개털 오버 입고 있던 이중섭의 집에 갔을 때 였다. 기강 잡는다고 특무대가 들이닥친 것은. "그때 이중섭이 빨간 크레용으로 일본에서 온 편지 뒤에 아 좋다!하는 모양으로 아이들 그림을 그린거야. 빨간색으로 그렸으니까 빨갱이라고 특무대가 발로 찼어." 결국 그가 나서서 진짜 빨갱이면 그러지 않는다고 해 사태를 모면했다.

이중섭이 서귀포 갈 적에 버스값이 없어하자 눈치 채고 주머니에 집어준 일이 어제일 같다는 장 화백. 그 시기, 홍종명, 제주화가 강태석과도 만났다.

어찌 잊겠는가. 그렇게 망향을 달래던 섬,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제주땅을. 비로소 떠날 때였다. 그 섬이 우는 땅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저것이 한라산이다! 하고 내렸는데 제일 큰 건물이 주정공장 하나였어. 그땐 맨 초가집 기와집. 야, 여기서 어떻게 사노 하고는 눈물이 나오더라. 그런데 떠나올 적엔 야, 이 정든 땅을 버리고 어떻게 가나하고 눈물이 나오더라. 또 제주도에선 가지말라고 당신이 일할 게 얼마나 산 같이 쌓여있냐. 관음사가 4·3으로 전소되고 다시 지을때야. 불화를 그려야 되니까 선생님 손이 필요하니 나가지 마세요. 가지 말라고 자꾸 붙잡는 거야."

# 서민의 애환 녹여내며 구상미술의 버팀목

화면속 노인들은 유유자적. 옆집 뒷집에 사는 이 같다. 볕바른 오후. 편안한 각도로 어깨가 꺾인 채 한참 오수에 빠져든 노인. 저 노인은 필경 흘러내리는 검은 톤처럼 한 시대의 명암을 전부 거쳤으리. 녹색과 갈색의 떠낸듯한 색조는 인간의 내면을 점철시킨다.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 '그늘속의 노인'. 기념비적인 인물상을 끌어냈다는 평을 받은 이 그림은 함께 낸 '복덕방 노인'과 저울질이 심했단다. 수상은 먼저 세상 뜬 아내의 덕이 컸다. "당신같이 인물을 꽤 많이 그리는 사람은 없더라. 인물을 그린다면 하나 그려야 되더라. 국전에 내려면 하나를 그려라 그런거야." 

   
 
     
 
담담한 마티에르와 독특한 터치. 그가 창조해낸 평범한 서민들은 밝음과 어둠의 대비가 독특하다. "왜 노인이냐고? 돈은 없지. 노인들은 대포나 한잔 사주면 좋다고. 내가 주머니 생기면 막걸리 한병을 사가지고 가면 마시거든. 그땐 복덕방 노인들이 다 한국전쟁 전에는 관공서에 중역으로 있었댔어. 관공서에 문서 내는 거 쓰라면 잘 쓰지 뭐. 내가 죽으면 마지막 사실계통이 죽는 거요."

사실주의적인 정물이나 고속도로 재건의 기록 등에 그의 붓이 칠해진 것은 60년대. 허나 귀향한 자의 얼굴처럼 그는 제주, 해변으로 다시 돌아간다. 강렬하게 내재된 잠녀들이 그를 사로잡았을까. 그의 화폭은 그의 삶의 공간과 두고 온 고향의 풍경들이 교차되는 지점이다.

아무래도 피카소가 훌륭한 화가라는 것을 믿는다는 장리석. "담배꽁초를 뜨락에다 딱 버렸는데 연기가 사악 나오는걸 그렸더라고. 입에 물었던 것 하고 불타는 것을 연필로 그렸는데 그걸 보고 놀랬어. 이것까지 그렸는데 뭘 못그렸겠나 놀랬댔어. "

# 장리석 미술상 제정 젊은 화가 용기 주고 싶어

"제주도가 너무 외국 흉내를 냈어. 풍다 석다했는데 돌이 얼마나 많아. 돌을 이용해야 해. 알지도 못하는 미국식으로 해놓으면 안돼. 돈을 어떻게 하면 빨리 버느냐하는 게 기계로 찍어낸 돌하르방이야. 도립미술관도 제대로 만들어야해." 뼈있는 한마디.

만사가 그러한 법, 그림도 즐겁지 않고는 못 한다는 장 화백. 그는 낙천적이다. 요즘은 스포츠 프로를 좋아한다. 귀가 좀 어둡지만 아직도 짱짱하다. "사람은 못 생겼지만 폼재는 거 하나만큼은 누구한테 지지 않는다"는 이 노화가의 건강비결. "사람은 마음으로 항상 베풀 줄 아는 정신을 가지면 고장이 안나." 젊어서 담배도 멋으로만 했다. 유머있게 살아온 그림인생도 일조했으리. 사월초파일생인 화단의 거목 장리석. 자식도 없는데 죽기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장리석 미술상' 하나 만들어 간섭하고 싶단다. 남은 재산을 정리해서 기금으로 만들고 그 이자로 활용할 생각이다.

그는 제주도는 문화를 가장 높이 놓아야된다고 톤을 높인다. "왜냐? 제주도는 독립된 섬이거든. 외국에서도 누구든 제주도 가면 재미난 것 많이 본다하고 말이야. 다 오게 만들어야 해. 조상이 쓰고 내려오던 것을 그대로 살려 나가는 것 다 있어야 해. 그것이 중요해."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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