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녀를 만나다- 독도해녀 5…협재 출신 박옥랑 할머니

울릉도 물질하다 ‘미역이 좋다’는 말에 무작정 독도행…물개와 뒤섞여 고단함 견뎌
섬 특유 습기·외로움·배고픔 등 힘들었지만 “다시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그 곳”

 

“그 때 얘기를 물어 뭐하게”

조금씩 기억의 언저리가 무너져 내리고 있지만 독도에서 물질했던 일만큼은 잊혀지지 않는 듯했다.

오래 전 봤던 영화 속 장면들처럼 단편단편 떠올리는 기억들은 이내 하나의 큰 그림이 된다.

동료인가 싶으면 물개가 옆에서 어른거리고 ‘엉엉’거리는 물개 울음소리에 이내 울적해진다. 지천인 갈매기 알을 물리도록 삶아먹으면서도 쉽게 섬을 떠나지 못했다.

때가 되면 다시 섬으로 갔다. 그 곳에서 기다리는 것이라고는 외로움과 고단함뿐이었지만 다른 선택 따윈 한 겨를이 없었다.

△‘무릉도원’ 울릉도

   
 
   
 
고향을 떠나 살고 있지만 박옥랑 할머니(76)는 독도에 대한 기억 만큼은 아직 협재에 살고 있는 또래와 공유하고 있었다.

독도 물질이라고 해서 사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울릉도와 독도에서 물질을 하는 것은 ‘돈을 버는 일’이라 해서 다른 잠녀들의 부러움을 샀다.

박 할머니 역시 앞서 소개한 김공자 할머니들과 동갑내기로 비슷한 시기에 물질을 배웠다.

박 할머니가 독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제 고인이 된 사촌언니(이춘양)의 영향이 컸다. 당시 울릉도에서 오징어와 명주를 사다 제주도에서 파는 장사를 하던 사촌언니의 “그 곳에 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무작정 울릉도 행을 택했다.

박 할머니는 “미역이 돈이 됐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왜 그곳에 갔나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울릉도 작업 중에 독도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미역이 좋다는 말에 발동선을 빌려 작업에 나섰다. 무서울 것 없던 바다였지만 독도를 향하는 배 안에서 평생 할 멀미를 다 했다.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질 쯤 독도에 닿았다.

3월부터 시작하는 미역작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한 계절이 늦은 바다에서 3월은 한겨울이나 마찬가지다. 물에 젖은 몸에 칼 같은 바닷바람이 닿을 때마다 독도에 온 것을 후회했다.

그것도 잠시. “이 맘때는 작업하기가 훨씬 수월했다”는 박 할머니의 표정이 편안해진다.

△“딴 물건은 눈에도 안 들어왔주”

독도 바다 밑은 말 그대로 미역밭이었다. 소라와 전복이 무슨 나무 열매 마냥 ‘드랑드랑’붙어 있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당시는 미역이 돈이 됐기 때문이다.

전복 등을 캐는 것은 또 허가가 필요했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배고픔을 견디려고 전복이며 소라를 ‘주웠다’. 수비대원들 역시 잠녀들이 있어야 맛볼 수 있는 전복을 은근히 즐겼다.

온종일 미역을 캐서 바위로 끌어다 널어 말리고 나면 밥을 해먹고 그냥 맨 바닥에 가마니 따위를 깔아놓고 자는 게 하루 일과였다.

각지불이나 촛불을 이용해 어둠을 쫓기는 하지만 섬 특유의 습기는 견디기 힘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바다에 깊은 곳은 열발 넘게 들어가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작업을 하다보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일본 순시함이 반가웠을 만큼 인적이 드문 그곳에서 독도수비대원과의 생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다리와 허리 통증으로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박 할머니지만 “다시 한번 독도에 가고 싶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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