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중국풍속, 말 할때 반드시 손 내젓고, 화 낼때 입 오므리고 침 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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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가 정무를 보거나 외국사진을 접견하는 자금성 건천궁 | ||
조선 오랑캐 관리 최부, 황제를 배알하다
1488년 4월 20일 북경의 옥하관에 머물던 최부는 황제를 배알하기 위해 자금성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상복(喪服)을 절대로 벗을 수 없었지만, 대상이 황제인지라 길복(吉服)으로 갈아입고 자금성 정문인 오문(午門)을 거쳐 대궐 안으로 갔다.
중국인 관리들은 최부를 공식적으로 호명할 때 '조선 오랑캐 관리 최부'라는 말을 빈번하게 썼다. 입궐하여 양옆으로 열을 짓고 늘어선 중국의 관리들 사이에서 최부는 황제를 향해 다섯번 절을 하고 세번 머리를 땅에 닿게 조아린 뒤 자금성을 나왔다.
옥하관에 도착하여 함께 갔던 표류인들은 황제로부터 상으로 받은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들뜬 마음으로 최부에게 다가와 절을 하며 자축(自祝) 하는 것을 보고, 최부는 그들을 나무랐다.
최부는 황제가 우리에게 상을 내린 것은 "우리 임금님이 하늘을 두렵게 여기고 큰 나라를 섬긴 덕분"이라고 굳게 믿었다. 최부는 철저한 유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를 숭상하였다.
이 근본주의는 유교 이념을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고 권위를 중시하며, 규율과 규범을 통해서 도덕적인 엄숙함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념을 말한다. 그래서 유교는 '효(孝)는 충(忠)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유포시켜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중국인 관리들이 부르는 '조선 오랑캐 관리 최부'라는 칭호에서 보듯, 중국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화이사상(華夷思想)을 이어오고 있었다. 곧 중화는 세계의 중심이며, 중화(中華)이외의 주변국 모두가 오랑캐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중국의 왕조들은 항상 국명 앞에 '큰대(大)'자를 붙여 '대명(大明)''대청(大淸)'이라 스스로 불렀고, 주변국들에게 그렇게 쓰도록 강요했다.
오랑캐라고 지명된 조선인 경우, 중국의 연호(年號)를 먼저 썼으며, 조선을 표기할 때도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는 식으로 중국의 조공국이자 책봉국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조선의 많은 관리들 또한 그에 동조했다.
그들에게는 공자가 가장 위대한 성인이었고, 공자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모든 근본이 예(禮)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형식을 중요시 여겼던 만큼, 제례(祭禮)의 실행이 곧 국가 질서를 위한 첫 번째 덕목이었다. 중국은 조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버이 나라였다.
황제를 배알하고 온 이틀 후, 갑자기 긴장이 풀린 최부는 감기가 크게 도졌다. 보름 전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감기 증상이 있었고 이제 와 그 증상이 악화된 것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 태의원사(太醫院士) 주민(朱旻)의 응급조치로 최부는 겨우 살 수 있었다.
몸이 낫기도 전에 최부는 귀국의 여정에 올랐다. 북경을 떠난 것은 4월24일, 호위 무사는 중국인 백호(百戶) 장술조(張述祖)와 그의 아들 장중영(張仲英)이었다.
중국인들은 호의를 베풀 때 음식을 가지고 와 위문을 했다. 최부 일행이 도시를 지날 때 이를 안 중국의 관리나 마을 유지들은 최부를 찾아와 음식을 나누어 주고 위로하였다. 위문품으로는 쌀, 고기, 야채, 술 등이었다. 먼 길을 갈 때는 잘 먹어야 하고, 그래야 병에 걸리지 않은 채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중국인들의 깊은 배려였다.
최부 일행은 중국 땅에서 중국으로 오는 조선의 사신과 조선을 다녀오는 중국의 사신을 만날 수 있었다. 첫번째 만난 조선의 사신은 사은사(謝恩使) 일행이었다.
사은사(謝恩使)란 중국에서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을 때 그것을 보답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하는 사절단이다. 이 사절단의 책임자는 정2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건(成健)이었다.
최부는 그의 환영을 받아 식량 10말, 삿갓 2개, 부채 10개, 속을 다스리는 알약 29알과 여러 가지 반찬을 받을 수 있었다. 또 호위 무사 백호(百戶) 장술조에게도 격려의 뜻으로 삿갓과 부채를 선물로 주었고, 사신단의 다른 관리들도 최부 일행에게 각각의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하루가 지나 조선에 황제의 칙서를 전하고 돌아오는 중국의 사신을 만났을 때, 그들로부터 '당신(최부)이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온다'는 소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번째 조선 사신을 만난 것은 5월16일, 광녕역이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신은 성절사(聖節使)인데, 곧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러 가는 정기 사신 일행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최부를 보고 감격한 사신은 모자라는 물건과 식량을 보충해 주겠다고 했으나 최부가 이를 극구 사양하자 최부의 수하를 불러 쌀 2말과 미역 2묶음을 억지로 주었다. 다시 밤이 되자 사신은 달이 내리 비치는 뜰에 최부를 불러 술상을 차리고 격려해주었다.
만나면 정들고 정들자마자 떠나는 것이 세상사인가. 20여일 넘게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이 광녕역까지 최부를 호위했던 백호(百戶) 장술조가 임무를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가려고 작별을 고했다.
그는 60이라는 나이 때문에 다시 최부를 만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공물을 바치거나 천자를 뵈러 올 때 오늘의 정리(情理)를 기억한다면 꼭 한번 우리 집을 찾아 주겠소?"라는 부탁을 남겼고, 이어 그는 속옷을 벗어 최부의 노비 오산(吳山)에게 주었다. 그가 장술조를 수발한 때문이었다.
다시 호위 무사들이 바뀌었다. 요동의 총병관은 통역관 백호(百戶) 오새(吳璽)와 천호(千戶) 전복(田福) 등 백호 30명, 군인 200명, 관부(館夫) 10명을 새로 따르게 하였고, 최부 일행이 타고 갈 말 43마리, 짐을 싣고 갈 말 15마리를 내주어 길을 떠나게 했다.
압록강까지 이르는 길은 매우 물살이 세고 길이 험악하며,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말과 사람을 살상하기 때문에 수행 인원을 늘린 것이다. 최부 일행은 요동을 떠난 지 5일 후 6월4일,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고 어두운 길을 달려 밤 12시경 변경의 요충지인 의주성(義州城)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의주성은 국경의 요충지라는 사실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성 곳곳이 무너져 내렸고 성안의 마을은 보잘것 없었다. 그래도 최부는 감회가 깊었다. 꿈에 그리던 조선 땅을 밟은 것을 무엇에 비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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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허벅을 진 제주의 비바리 1890년 | ||
최부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곰곰히 되새겼다. 처음 표착한 영파부 우두 바깥 바다(1월17일)-도저소(1월19일)-항주(2월6일)-북경 옥하관(3월28일)까지 모두 6000여 리, 다시 북경의 회동관(4월24일)-요동성 요양역(5월23일)까지 1700리, 요동(5월29일)-압록강(6월4일)까지 300여 리, 모두 8000리에 이르는 길이었다.
최부가 강남에서 강북에 이르는 중국 땅 8000리 대장정 동안 본 중국의 풍속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강남은 기와지붕에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계단은 다듬어진 돌을 이용했다.
돌기둥을 세워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몄지만 강북은 자그마한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다. 강남 사람들은 크고 넉넉한 검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거나 고급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었지만 강북에서는 짧고 좁은 흰옷을 즐겨 입었고, 가난하여 헤진 옷을 걸친 이가 열에 셋이나 되었다.
강남의 인심은 온화하고 유순하여 형제, 친척들이 한집에서 살았지만 강북에서는 간혹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살기도 하며,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두 등받이 의자에 걸터앉아 일을 보았다.
강남의 부녀자들은 문을 나오지 않고 붉은 누각에 올라가서 발을 걷고 밖을 멀리 내다보지만, 강북의 부녀자들은 스스로 밭을 갈거나 노를 젓는 등 힘든 노동을 했다.
특히 서주(徐州)와 임청(臨淸) 등지에서는 부녀자들이 화려한 치장을 하여 몸을 팔아 돈을 받고 살아갔다. 강남의 군대는 명령에 잘 따르고 한번 호령하면 대오 정돈이 잘 되는데, 산동(山東) 이북에서는 명령을 내려도 말을 잘 듣지 않아 채찍질이나 구타를 하지 않으면 대오가 정돈되지 않았다.
강남에서는 수레를 타고 길을 가고, 강북에서는 말과 나귀를 타고 길을 간다. 강남에서는 농업과 공업에 힘들여 일하지만 강북에서는 놀고 먹는 무리가 많았다.
강남에서 사람이 죽으면 부잣집에서는 묘당을 세우지만 보통 사람들은 관을 써서 묻지를 않고 물가에다 버리므로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강북에서는 무덤을 강가나 혹은 밭두둑과 마을 안에 조성하였다.
강남과 강북이 동일한 풍속은 귀신을 숭상하고, 도교와 불교를 떠받드는 것이다.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손을 내젓고, 화를 낼 때는 필시 입을 오므리고서 침을 뱉었다.
밥은 거칠고 조금 찧은 쌀을 쓰며 식탁과 그릇, 젓가락을 사용했다. 이를 잡으면 꼭 입에 넣어 씹었다. 다듬이는 모두 돌로 된 것을 사용했다.
연자마를 돌리는 데에는 나귀와 소를 썼고,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등에 짐을 졌고, 머리에 짐을 이지 않았다. 높은 관리나 부잣집 사람들도 장사로 직업을 삼아서 소매 속에 저울을 넣고 다니며 이익을 따졌다. 관청에서 행하는 일반 형벌은 대나무 조각 같은 것으로 매를 치거나 손가락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것이었다.
최부가 조선에 돌아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중국의 수차(水車)였다. 이를 안 성종은 1488년 6월 최부에게 솜씨 좋은 목수와 함께 중국식 수차를 만들도록 명하자 그는 두 달도 안 넘기고 손으로 돌리는 수차를 만들어 바쳤다.
최부의 「표해록(漂海錄)」은 15세기 중국의 해로(海路), 기후, 산천, 지리, 도로, 풍속 등 기행문의 걸작이다. 놀라운 기억력과 탁월한 문장력으로 이루어진 일기체 형식의 이 체험기는 세기의 시간을 넘어서 중국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부는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돼 장형(杖刑)을 받고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유배를 갔고, 귀양살이 6년 뒤 갑자사화 때 다시 사형을 언도 받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