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자(제주도여성특위 여성사정립분과위원장)

   
 
   
 

얼마 전 사려니 숲길을 다녀왔다. 해발600m의 한라산 자락을 타고, 노루와 소를 다루던 쇠테우리가 다녔다는 좁은 길. 태고의 신비함과 원초적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그 길을  사십 리 가까이 걸었다. 짙은 녹음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그날따라 유난히 찬란했다.
 
사려니 오름으로 가는 다섯 시간 남짓한 행군 중 나에게 최고의 기쁨과 성찰을 안겨준 것은 삼나무 숲이었다. 처음 보고 듣는 산뽕나무, 때죽나무, 서어나무의 식생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었지만, 한 치의 구부러짐도 없이 창공을 향해 뻗어 오른 울창한 삼나무군사이로 바람이 놓아준 듯 오롯이 나있는 작은 송이길과 올곧게 자신을 추스려 울창한 숲을 이룬 나무군단 아래로 펼쳐진 서귀포바다, 그리고 그 위에 점처럼 떠 있는 섬 속의 섬 지귀도. 동공을 비집고 들어온 진풍경들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저들에게 다구진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들은 누구일까. 작은 종자를 양묘하여 30M의 수고(樹高)로 자연의 경이로움을 토해낸 칠십 여 년 전 그 투박한 손길들, 그 주인공에게 나는 고개 숙여 마음을 전했다. 

오래전, 나의 아버지도 저기 서있는 저 삼나무의 튼실함을 염원하며 아마 세상에 씨앗 하나 심으셨을지 모른다. 일밖에 모르던 내 어머니 역시 그 부실한 씨앗 하나 제대로 거두려 평생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생을 사셨을 것이다. 그로부터 오십년이 지난 지금, 그 나무는 얼마나 자랐을까. 이미 세상을 떠난 두 노인의 바람대로 푸른 숲을 이루는 청량한 거목이 되어가고는 있을까.

 같이 출발했던 일행들의 모습이 먼발치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기는 낯익은 모습들이 바람처럼 편안하다. 피톤치드향에 취해 생각에 잠기다보니, 녹빛 수액이 물찻오름처럼 몸안에 차오른다. 나는 한그루의 튼실한 나무가 된 양 높은 하늘을 향해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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