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영(소설가)

섬은 섬 안에도 있다. 낮은 포복 자세로 옹송그린 작은 섬들이 하늘로 이르는 산비탈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섬에서 난 사람들은 섬으로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산자락을 가득 메운 섬 주인들의 지난 삶은 천차만별일 터인데, 떠나고 난 자리는 비석, 상석 하나뿐인 소박한 모습이다.

살았을 적, 금으로 궁을 지었다해도 가져가는 것은 수의 한 벌. 그마저 세월에 풍화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앙상한 유골뿐이고, 생전에 천하를 호령했다 해도 돌아갈 때는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찾아들어가는 게 사람이다. 그 자리엔 차마 빈부, 학력, 종교, 정치가 끼어들지 못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죽음을 준비하며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한조각이라고 말했나보다.

핏대가 설 정도로 꼿꼿하던 거만함이 등굽은 묘지 앞에서는 절로 숙여진다. 왜 이제야 왔을까. 세상에서 가장 늦은 게 후회라고들 하지만, 떠난 사람 앞에 서면 늘 후회만 남는 것 같다. 이제 내가 떠난 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꽃 한 다발과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기억들뿐이다.

그리 높지 않은 무덤 앞 비석은 손바닥에 생채기를 낼 만큼 이미 차가워져 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나보다. 수만년 전, 처음으로 무덤을 만든 이는 그 앞에 커다란 돌 하나를 세웠다. 아마 그 때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살다간 흔적 남겨주기 위해 무심히 세웠던 돌 한 덩이가 수만 년을 이어 내려와 사람 떠난 자리를 지켜주게 되리란 것을….

이제 우리는 그 돌 위에 그리운 이의 이름을 새기고, 함께 했던 삶을 기리는 글 한 줄을 덧붙인다. 떠난 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이라고도 할 수 있고, 어쩌면 그가 남긴 전부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 그의 묘비에 무어라 적어야 할 지 정하지 못했다. 옛 원시시대의 그것처럼 그의 묘비는 텅 비어 있다. 밀린 숙제를 보는 것처럼 하루가 지날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의 말처럼 너무 커서 걸림돌이 되지 않게, 또 너무 작지도 않아 항상 눈에 들어올 수 있는 마지막 인사를 적어야 할 텐데. 쉬이 결정내리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내 안에 지독한 거만함이 남아 있는 탓은 아닐는지…. 더 깊이 숙여야 떠난 사람의 마음에 위안이나마 줄 수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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