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제주의 해안방어-2.봉수
봉화 갯수로 변방상태 파악…봉군 근무조건 열악 보고체계 혼란 야기

   
 
  제주의 진상마를 내리던 강진의 마량항  
 

봉군(烽軍)의 고초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것을 부리는 사람들의 능력과 역량에 따라 그 제도의 장단점이 드러난다. 봉수(烽燧)가 변경(邊境)의 위급한 상태를 알리는 중요한 군사시설이나 봉수(烽燧)의 운영은 만만치가 않았다.

봉군(烽軍)들의 실수가 계속되면서 봉수제(烽燧制)의 폐지가 때때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를 대체할 뾰족한 대안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면 봉수(烽燧)가 해이해지는데 근년에 여러 번 변방의 변고(變故)가 있었는데도 모두 그것을 알리지 않았으니 무슨 까닭인가?"

성종(成宗) 6년(1475), 봉수의 운영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성종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앞으로는 변방의 진(鎭)으로부터 서울(京師)에 이르는 모든 봉수 가운데 후망(候望)을 보지 않아서 중간에 끊어져 통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철저하게 국문(鞠問)하여 중죄(重罪)로 다스려라. 병조(兵曹)는 제정된 제도에 따라 사람을 배정하여 후망을 보게 하되, 변고(變故)가 있으면 밤에라도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고, 일이 없으면 이튿날 아침에 승정원으로 보고하라.

봉수군은 신역(身役)이 가볍다하여 사람들이 앞 다투어 먼 곳에서도 사람들이 들어오니, 이들은 황혼을 이용하여 후망하기 때문에 낮과 밤에 번을 설 사람이 부족하다.

앞으로는 봉군을 모두 부근에 사는 사람들로 정하여 늘 봉수대를 떠나지 말고 망을 보게 하고, 그곳의 수령으로 하여금 엄하게 감시하되, 이를 어기는 자가 있거든 수령도 같이 죄를 따지라.

낮에 알리는 것은 반드시 연기로 하되, 바람이 불면 연기가 곧바로 올라가지 못하므로 후망(候望)하기 어려우니 이제부터 봉수가 있는 곳에는 모두 연통(煙筒)을 만들어 두게 하라. 그러나 바람이 어지러워 연기가 흩어져서 후망할 수 없을 때에는 그곳의 봉군이 달려와서 보고하고 이를 다시 전달하도록 하라."  

사실 봉군(烽軍)들은 무지렁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개 말(馬)이 없는 사람들로 임명되므로 고단(孤單)하고 빈한(貧寒)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간혹 죄를 짓고 군졸로 강등된 관리들도 끼어 있었다. 봉수의 운영문제가 발생하자 먼 거리 사람들은 봉군에서 제외되었고, 언제라도 동원이 가능한 변방 주변의 마을 사람들로 이를 채웠다.

봉군들은 국경 너머 혹은 강 건너 바다를 쳐다보며 적이 어디에서 오고 가는지 기약 없이 망을 봐야한다. 또한 다른 봉수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 했는지도 같이 살펴야 한다.

그러다 상황에 따라 잽싸게 불을 피우고 규칙에 따라 봉화의 숫자로 변방의 상태를 알려야 한다. 봉군들은 한자를 몰라 언문(諺文)으로 된 봉군의 수칙을 돌 벽에 붙여놓고 이를 배웠다. 봉화(烽火)를 피우는 것도 제각각이었다.

세종 때 봉수의 제도가 정비된 이래, 5거(炬)의 원칙을 지켜야 함에도 봉군들이 드는 봉화의 개수가 자주 틀려 보고체계에 혼란이 일었다.

연이어 2·3개의 봉화를 피워야 함에도 1개만 피우거나 어떤 때는 적군이 고을을 몰래 침략하여 아군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봉화는 잠잠하기도 했다. 이런 실책들은 봉군의 잘못이 아니었다. 1인 다수의 역할을 하게 한 조선의 수탈 체계의 결과였다.

봉군의 근무 조건은 위험요소가 매우 높았다. 높은 산 위의 봉수에서는 벼락을 맞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중종 20년(1525), 함경도 지역의 봉수에서는 벼락이 떨어져 흙으로 쌓은 봉수가 무너지고, 봉군 설물금(薛勿金)이 벼락을 맞아 날아갔고, 그곳에 같이 있던 다른 봉군은 크게 화상을 입어 살빛이 누렇게 탔으며, 오른 쪽 어깨 위에 전서체(篆書體) 같은 자국이 생기기도 하였다.

또 명종 11년(1556)에 전국적으로 큰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칠 때 전라도 남원에서는 김세견(金世堅)이라는 봉군이 벼락을 맞아 즉사했다.

해안가에 있는 연대(烟臺)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봉군들은 상륙하는 적과 접전하다가 칼에 죽거나 화살을 맞아 목숨이 위태롭기가 다반사였다. 해안은 바로 일선(一線)이었다.

왜구들이 쳐들어오면 이들은 빨리 봉수로 상황을 알리고 바로 육지에 상륙한 적과 접전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그 위험과 고초는 말이 아니었다. 겨울이 되면 손발에 동상이 걸리거나 저체온증에 시달렸고, 간혹 봉군의 처지를 동정하여 조정에서는 겨울옷을 지급하기도 했지만 생색내기에 그쳤다. 

봉군의 걱정거리는 날씨였다. 봉수는 안개가 끼고 구름이 어둡거나 비가 올 때는 무용지물이 되다보니 앞이 보이지 않는 날씨에는 사람이 달려가 다음 봉수로 직접 보고했고, 시야가 좋지만 바람이 불 때를 대비하여 토끼똥을 모아 연기를 피워야 했다. 토끼똥으로 연기를 내면 또렷하고 곧게 하늘로 올라간다.

   
 
 

강진현 지도 18세기

 
 
봉수의 제도 

봉군(烽軍)의 편제는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봉군의 편제는 지역과 위치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었다.

봉군은 봉졸(烽卒), 봉화군(烽火軍), 봉화간(烽火干), 간망인(看望人), 후망인(候望人), 해망인(解望人) 등으로 불렸고, 이들의 책임자는 오장(伍長) 혹은 감고(監考)라 하였다.

전라도 강진의 남원포봉수(南垣浦烽燧)인 경우 근무 인원은 봉졸 10인과 오장 2인이었다. 시설은 봉화 둑인 연대(煙臺), 불을 지피는 아궁이인 연조 신호로 불을 놓는 장소인 봉화소(烽火所) 5개로 이루어졌고, 연대 위에는 임시로 지은 집인 가가(假家)가 있었다.

이 남원포봉수(南垣浦烽燧)가 중요하게 된 것은 1453년 인근에 계참곶(桂站串) 목장이 설치되었고, 1499년 해방(海防)을 위해 마도진성(馬島鎭城)이 축성되어 바다의 적을 막는 요지(要地)였기 때문이었다.

남원포봉수(南垣浦烽燧)는 1454년 전라도 강진군(康津郡) 마량면(馬良面) 거차산(鉅次山)에 설치된 원포봉수(垣浦烽燧)였다가 1481년에 현 이름이 개칭되었다.

거차산은 해발 358, 둘레는 14㎞이며 원포(垣浦) 마을 북쪽에 위치한다. 이 원포는 757년 개설된 탐진현(耽津縣)일 때 '탐진포(耽津浦)', '원포(垣浦)'로 부르다가 1481년경부터 '남원포(南垣浦)'라 부르게 되면서 봉수 이름도 바뀌었다.

이곳은 육지에서 제주로 가는 뱃길이 시작되는 곳이자, 제주에서 오는 세공마(歲貢馬)들이 상륙하는 지점이었다.

제주에서 오는 말들은 이곳에서 배 멀미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정 기간 쉬다가 말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판단되면 말테우리(牧子)들은 다시 그 말들을 서울로 몰고 갔다.

송파(松坡) 이희풍(李喜豊, 1813~1886)의 「제주공마가(濟州貢馬歌)」는 제주 말들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주에서 바칠 말은 300필/5월이면 이진(梨津, 해남)에 배가 닿는다/말테우리들 말을 몰아 장안 가는 길/여름날 불덩이 같은 햇볕 내리쬐누나/창자 헤지고 모습 변해 야위었으나 의연한데/서울 아이들 무리지어 웃으며/ 놀란 말에다 채찍질 하네/모두가 남쪽은 좋은 말 없다하니 사람 만나 뒷발질 하고/머리 숙여 눈물을 떨구며/쓸쓸한 울음 하늘에 보내네/대궐 가까운 용마(龍馬)의 마굿간/밤색 말 비단 깔개를 무네/찬서리에 발굽 닿아도 움직임 없고/오래도록 임금의 수레를 따른다/험한 뱃길 좇음이 이와 같으나/세상에 주인 있어 누가 아껴나 주리/때로 떠돌이 시장에 팔려/곡식과 나무 돈 받고 실어다 줄뿐/나고 자란 한라산을 생각하니/맑은 물에 풀은 무성했구나.

강진의 남원포봉수(南垣浦烽燧)는 전국의 5거(炬) 봉수 중 마지막 봉수로, 순천에서 서울까지 내통하는데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으로 나뉘었다.

직봉(直烽)은 봉수의 주요선으로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는 봉화였다. 동북(東北)은 경흥(慶興), 동남(東南은 동래(東萊), 서북(西北)은 강계(江界)와 의주(義州), 서남(西南)은 순천(順天)인데, 모두 서울의 목멱산(木覓山) 봉수에 이르도록 하였다.

직봉으로, 내륙의 마지막 봉수인 남원포봉수(南垣浦烽燧)는 순천으로 전달하여, 흥양, 장흥(全日山, 天冠山), 해남(館頭山), 진도(女貴山, 僉察山), 해남(黃原城), 나주, 군산, 무안, 함평, 영광, 무장, 부안, 옥구, 임피, 함열, 용안, 은진, 공주, 천안, 아산, 직산, 양성, 수원, 남양, 안산, 인천, 부평, 김포, 통진, 강화, 교동, 김포, 양천, 서울(木覓山)로 전달되었다. 간봉(間烽)은 직봉(直烽)의 중간 지점을 연락하거나 변경의 초소로부터 본진(本鎭)과 본읍(本邑)에 보고하는 봉화였다.

간봉(間烽)의 순서는 장흥(全日山 直烽), 억불산(億佛山), 강진 수인산(修人山), 강진 본읍(本邑)으로 전달되었다.

실제로 세종 때 제정된 법령의 편제인원은 각도(各道) 해안가 에 설치된 연대(煙臺) 한 곳에 봉군(烽軍) 10명과 감고(監考) 2명을 정하여,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으로 교대하여 근무하도록 하였다. 해안가가 아닌 산 위의 봉수에는 한 곳에 봉군 6명, 감고 2명을 정하고 2교대로 나누어 번을 세웠다.

밤과 낮에도 항시 망을 보게 함으로써 유사시 적의 침략에 대응하도록 하였다. 봉수의 제도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서울에 전달하게 하고, 각도의 수로(水路)와 육지의 봉화를 서로 온 길에 준하게 하며, 병조(兵曹)로 하여금 '아무 곳의 봉화는 아무 곳에 준하게 하여' 산명(山名)과 그 위에 만들어진 봉수의 수를 수로(水路)와 육지로 분류하여 등록하게 하였다.

이 등록된 봉수는 병조, 승정원, 의정부와 봉수가 있는 각 고을의 관찰사, 절제사, 처치사의 병영(兵營)에 각 1건씩 간수하여 후일에 증거로 삼도록 하였다. 이는 법 집행을 위한 근거로 활용되었고 봉수 관리가 허술했을 경우 지방관들은 그에 해당하는 댓가를 치렀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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