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해안방어-제주의 봉군
부의 축적 위해 기승 부렸던 노예장사 계몽주의 영향 폐지

   
 
 

흑인들. 안젤라 피셔 사진 

 
 

당포(唐浦)에 버려진 5인의 흑인

제주 정의현(旌義縣)과 대정현(大靜縣)은 한라산 남쪽의 동서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의 남쪽 변방 중 가장 멀리 있는 국경의 끝이자 유배지였다. 이곳의 바다는 남태평양의 물길이 맞닿아 있어서 수많은 이양선(異樣船 : 서양배)들이 주야로 지나간다.

여름철에는 태풍의 길목이기 때문에 예측 없이 큰 바람이 불어 지나가는 배들이 자주 표착(漂着)하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정의현은 천미포(川尾浦), 말등포(末等浦), 토산(兎山)해변, 대정현은 차귀진(遮歸鎭) 대야수포(大也水浦), 예래포(猊來浦), 당포(唐浦), 질 천포(叱川浦) 등이 대표적인 지역이다.

순조 원년(1801) 10월30일, 하늘은 맑고 바다는 매우 잔잔했다. 대정현(大靜縣) 당포(唐浦 )는 큰 배를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깊고, 태풍이 불어도 배가 손실되지 않는 천연적인 지형지세를 갖춘 포구로서 예로부터 이름이 난 곳이다.

그 때, 바다를 감시하던 당포(唐浦) 연대(煙臺)에서는 바짝 긴장감이 돌았다. 수평선에 작은 점이 점점 커지는 듯하더니 당포 해안으로 큰 배 한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포 연대의 봉군(烽軍)들은 눈을 부릅뜨고 국적을 알 수 없는 배를 주시하였고, 그 배가 우리 배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가시거리에 오자 다급하게 연기를 피워 올려 이양선의 출현을 알린 후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봉군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이양선은 매우 빠르게 해안에 배를 대고 5인의 사람들을 내리고 곧바로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봉군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이양선이 버리고 간 5인을 잽싸게 체포했다.

그러나 체포한 사람들의 의복과 외모를 보니 너무나 이상하였다. 옷은 좁아서 몸을 묶은 듯하고, 발에는 버선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머리에는 등립을 썼는데, 얼굴이나 몸이 모두 검고 그 모양이 원숭이와 매우 흡사했다. 지껄이는 말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글자를 쓰게 했더니 오른 손에 붓을 잡고 왼쪽방향으로 글을 쓰는 데 전서체(篆書體)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며 마치 실이 얽힌 것 같았다. 이 사실을 지방 관리(道臣)가 아뢰자 육로로 북경(北京)에 압송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대왕대비가 영의정 심환지(沈換之)를 불러 사실을 물었다. "제주에 표박(漂迫)한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냈는가?""말이 분명하지 않고, 글 또한 이상하고 복장도 해괴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 상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내 일찍이 사방(四方)의 글자가 같은 것으로 알았는데 글자도 다르다는 말인가?""왼손으로 써 가는데 그 글자 모양이 꼬불꼬불하여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금번 북경 사신이 가는 편으로 미처 딸려 보내지 못하였고, 또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지 못하니 답답한 일이로다."

답답하기는 비변사(備邊司)의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그 5인의 흑인들을 다시 제주도의 표착지로 보내어 그들의 배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다 배가 오면 그 편에 부쳐 보내고, 만약 오지 않는다면 제주도에 적당한 곳을 골라 향화인(向化人)으로 살게 하도록 건의하니 그렇게 하라는 답변이 내려졌다.

즉 관에서 식량과 의복을 지급하며 무작정 세월을 기다리면 풍속도 익히게 되고 말도 점차 통하게 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향화인(向化人)'은 즉 귀화(歸化)한 사람을 일컫는다. 원래 향화인은 고려 태조 때부터 쓰던 말이었다. 당시 향화인은 여진인(女眞人)들인데 고려에 귀화한 사람(投下人-投下女眞人)들을 지칭했다.

또 향화인으로는 왜인들이 있었고, 이들을 '향화 왜인'이라고 하여, 고려 말부터 극성을 부리던 왜구에 대한 정책으로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왜인에 대해 '오는 자 막지 않고, 가는 자는 쫓지 않는다(來者莫拒 去者勿追)'라는 적극적인 유화정책을 펴자 무역을 하기위해 귀화하는 왜인들이 부쩍 늘게 되었다. 이들에게는 밭과 집을 주어 경상도를 비롯하여 각지에 거주케 하였다. 이들 중에는 소수가 의학 및 기술자 등이 있었으나 다수의 왜인들은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들은 조선 태조 이래 10년간 약 2000명이나 되었다.

   
 
 

당포

 
 
생존 흑인 3인 제주에 살아

대정현 당포의 버려진 5인의 흑인들은 곧바로 귀화시켜 제주에 안착시키지는 않았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1801년 10월 중국 심양(瀋陽)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가는 도중 한 명의 흑인이 병사(病死)했고, 더구나 중국에서도 이들을 받아들이자 부득불 조선의 제주에 살도록 하였다.

그 후 흑인 한 명은 4년이 지나 병에 걸려 죽었고, 남은 세 명 가운데 한 명의 흑인이 조금씩 글자를 깨우쳤지만, '어(魚)'와 '노(魯)'를 구별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말을 배워가는 흑인이 항상 동남쪽을 가리키며 자기 나라 이름이 '막가외(莫可外)'라는 말을 했지만, 그 나라가 어느 곳에 있는 어떤 나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류큐(琉球)의 표류인(漂流人)들로부터 그들이 '필리핀(呂宋國)'사람 같다는 믿음을 얻게 되자 그들의 송환 문제가 다시 활기차게 거론되었다. 바로 류큐(琉球)의 표류인들에게  자신들이 돌아가는 배편에 필리핀을 경유하여 그들을 내려놓고 가도록 부탁하려고 했으나 류큐인들이 이를 거절하고 자신들만 돌아가고 말았다.

1809년 남은 세 명의 흑인들은 관의 보호를 받으면서 말과 풍속을 익히도록 하던 차에 때마침 나주목(羅州牧) 흑산도(黑山島)의 문순득(文順得)이라는 사람이 필리핀에 표류하였을 때 그 나라사람들의 모양과 옷, 언어를 기록하여 온 바가 있었다. 문순득이 그들을 보는 순간, 자신이 기록해 온 모습과 용모가  비슷하여서 시험 삼아 필리핀 말로 문답을 해보니 말이 꼭 들어맞았다.

세 명의 흑인들은 미친 듯이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9년만에 처음 들어보는 자기들의 말이었기에 스스로 슬픔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며 눈시울을 적셨다. 만 9년이 지나서야 분명히 그들이 필리핀인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인간의 이동 국제적 이민

필리핀의 흑인 5인의 제주도 유기(遺棄)는 노예무역의 한 일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 15세기 초 무역항으로 번영했던 말라카 왕국은 동남아시아 무역의 상품 진열관 같은 역할을 했다.

이것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로 하여금 향신료 및 노예무역의 전조(前兆)가 되게 하였고, 18~19세기에 이르러 확립되는 구미의 제국주의·식민주의 침략의 결과가 되었다.

노예무역은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다. 적어도 제국주의자들의 야심은 사람을 경제적 효용가치로 보는 데 와서 최악에 달한다.

17세기와 18세기 초에는 사로잡힌 노예 4명중 1명꼴로 죽음을 맞았다. 노예들은 50일 이상의 긴 항해 동안 앉은 채로 잠을 자야만 했고, 쇠사슬에 묶인 채 용변을 해결해야 하니, 갑판은 더러운 배설물로 넘쳐흘렀다. 이질과 전염병이 만연해 갔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이 되면 노예의 사망률은 15%로 낮아졌다. 극심한 노예사냥으로 1800년대 아프리카는 인구 감소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총 2700만명 이상이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팔려갔는데, 약 500만명은 브라질로, 50만명은 미국으로 팔려갔다. 1500만명은 아랍 노예상인들에 의해 아시아 지역으로 팔려갔다.

상품으로서의 인간은 고가로 거래되었기 때문에 1800년 이후부터 선상(船上) 생활의 여건이 개선돼 사망률도 5~10%로 떨어졌다.(루크 붕크, 2006) 오로지 상품으로서 인간 품질 유지에 대한 서비스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는 흑인 노예들이 경제적인 효용가치에 의해 철저하게 물건으로 취급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부의 축적을 위해 기승을 부리던 노예장사는 계몽주의의 결과로 덴마크는 1803년에 막을 내렸고, 1807년에 영국, 1808년에 미국, 그리고 1818년에 프랑스가 차례로 노예매매를 금지하였다. 500만명의 흑인 노예를 보유했던 브라질은 영국의 압력으로 1850년에야 노예매매를 금지할 수 있었다. 노예제도 자체가 폐지된 것은 1815년 오스트리아 빈 회의 결과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국가들은 자신의 식민지에서도 노예제도를 폐지하기로 합의하여, 영국(1833), 덴마크·프랑스(1848), 네덜란드(1864)가 차례로 이에 따랐다.

1790년 미국 남부의 주들에서는 전체주민의 40%에 달하는 약 70만 명의 노예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1850년  이후 노예제도 '폐지'를 둘러싼 미국 남부와 북부의 주들 사이의 대립이 악화되었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1865년 미국 전역에 노예를 해방한다는 내용의 '헌법부칙 제13항'이 공포되었다.  
   
노예제도의 폐지 이후, 이민의 형태를 빌어 인구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은 역사상 최대의 인간이동이 시작된 시기다. 인구의 이동에는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출, 지역간 이동, 마을에서 마을로의 이동, 대양의 횡단, 변경지역으로의 인구의 유입 등 다양한 경로에 걸쳐 일어났다. 특히 미국 등으로의  국제적인 이민은 노예무역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유럽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이민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서유럽과 독일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노예무역의 금지로 인해 발생한 노동력 공백의 일부는 주로 인도나 중국에서 공급된 '도제살이 계약 노동자들'에 의해 채워졌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는 노예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홉스봄, 2008)

그렇다면 어느 날 갑자기 제주도 당포 해안에 내려진 5인의 흑인은 무슨 까닭으로 버려졌을까. 노예무역 또한 자본주의 세계체제 관점에서 보면, 1801년 제주도에 내려진 흑인의 의미는 조선의 사회 또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예견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을 사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생각한 나머지, 자신들에게 필요한 상품의 경제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그들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주의 봉군들은 노동력에 비해 그것을 유지할 밥값이 아깝다고 생각한 자본주의의 법칙을 의도하지 않아도 생생하게 본 것이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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