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성 이시돌 목장 세운 맥그린치 신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사랑이죠” 사제의 우리말 답은 간명했다.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중산간에 성 이시돌목장을 이룩한 사람. 저 유명한 문호 제임스 조이스, 예이츠를 탄생시킨 나라 아일랜드에서 온 사제. 강론하면서 피아노도 친다. 유머넘치는 이 여든의 사제를 사람들은 목자 혹은 성자라 부른다.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 53년전, 스물다섯 청년 신부가 서서 바라보던 황량한 돌벌판은 연두빛 목장으로 변해있었다. 한 인간이 기도와 사랑으로 가꾼 대지는 실로 혁명적이다. 제주사람보다 더 제주다운 가치를 아끼는 사람, 그는 바람의 땅에서의 삶을 행복하다 했다. 사제가 서 있는 정물오름 자락으로 푸른 바람이 밀려왔다. 성 이시돌 목장은 우리에게 사랑의 증거이며, 희망의 증거이다. 성이시돌 목장은 겸허하였다. 그 앞에 선 저 실천하는 사랑의 사제처럼.


   
 
  맥그린치 신부는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Patrick James Mcglinchey) 신부. 1928년 남아일랜드 레터켄에서 출생. 1951년 12월 사제 서품.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3년 한국 도착. 1954년 제주도 한림공소로 부임. 한림성당 준공. 한림 신용협동조합 설립(1962) 4-H클럽 조직 가축은행 개설(1957) 성 이시돌 중앙실습목장 개설(1961) 성 이시돌 배합사료공장 가동(1964) 성 이시돌의원 개원(1970) 성이시돌 양로원 개관(1981) 성 이시돌 유아원 개원(1986) 성 이시돌 노인복지회관 개관(1988) 성 이시돌 회관 및 성 이시돌 성당준공(1990). 성 이시돌복지의원 개원(2002) 성 이시돌 젊음의 집 개관(2005) 등 많은 일을 하였다. 1966년 5·16민족상, 1975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고, 대한민국 석탑산업훈장, 내무부 장관상, 적십자 봉사상 등을 받았다. 1973년 두 번째로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아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갖고 있다.
 
 
그날, 스물다섯 푸른 눈의 사제가 왔다. 1954년 4월. 43의 상처가 스멀거리던 우울한 돌섬. 바람이며 돌담, 초가가 그의 고향 섬의 풍경과 많이 닮아있는 한라산 자락에. 제주사람들을 만났다. 함께 성당을 지었다. 청년신부는 팔을 걷어 올린다. 사람들을 살려야했다. 처음엔 말도 안통하는 이 섬에서 처음 만난 말 ‘안됩니다’. 몇 년 후 그 ‘노우’를 ‘된다’로 바꿔놓았다. 삶을 포기하고 싶어하던 사람들은 기운을 차렸고, 아픈 사람들은 의탁할 곳이 생겼다. 마을 청년들은 일할 곳이 생겨 고향에 남았다. 제주바다를 건너오던 이십대의 사제는 잘생긴 배우처럼 수려했다. 성 이시돌 목장. 어떻게 사제는 이 중산간에 사랑을 실천했을까. 그의 제주사람에 대한 사랑은 어디까지인가.

# 아일랜드와 닮은 제주사람들의 성정

“제주사람들은 독립성 있고, 고집세요. 어렵게 살아도 실망하지 않고 부모들이 특히 아이들 대학 보내려고 희생 얼마나 많이 하는지…. 땅까지 다 팔고. 그런거 나 여기와서 처음 봤어요. 어려운 일인데 바닷가에 해녀들 나가는 것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일랜드 사람들처럼 유머도 있고 우리와 비슷한 점도 많아요.”

목축의 나라 아일랜드. 그의 아버지는 청빈하고 인정많은 수의사. 형님도 수의사였다. ‘꼬마수의사’ 어린 맥그린치도 젖 짜고 학교에 갔다. 아홉 살부터 운전도 했다. ‘불법으로’. 아버지가 가르쳐줬단다. 기도하는 분위기속에서 자란 소년이 고교졸업후 선택한 삶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마음이 이끄는대로였다. 1951년 12월, 7년의 공부 후 교회가 가라고 한 곳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있는 땅 한국. 순종의 신부는 전쟁중인 나라에 들어오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53년 맨처음 도착한 피난지 부산에서, 목포, 순천의 보좌신부를 거치고 발령난 곳은 제주도. 제주에 중앙, 서귀포 성당 두 곳 밖에 없던 시절, 그는 한림공소에 부임해 성당을 세우는 일을 맡았고, 그것을 완수했다. 청년사제가 발을 들여놓은 금악리는 허허벌판 돌밭의 광야. 게다가 4·3의 상처를 소리죽여 안고 있었다.

# 4·3의 흔적과 가난으로 물든 땅, 제주도

“사람들은 무서워서 말들 안했죠. 조용히 들었어요. 하귀 학살사건 직접 목격한 사람한테. 남편 부인 아들. 사람들 다 바닷가에 살고 있다가 중산간에 왔어요. 너무 형편없었어요. 빈한했어요. 굶어죽는 사람 있었고, 빚 못 갚아서 자살하는 사람 많이 있었죠.” 그 상처와 가난을 치유해주고 싶었다. 95%가 농민들, 가장 급한 것은 먹고 살 일. “우리 교회에서는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해요. 이웃을 도와주는 방법 여러가지 있지만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렇게 그의 과학적인 영농은 기도와 함께 시작됐다. 젊은 사제도 일주일에 한번 꿩사냥해서 먹고 살았다.

물론 말은 안통했으나 바닷가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왜 이런 일 하면서 어렵게 사느냐. 중산간 가면 소 기를 수 있지 않느냐. 어른들이 안된다했어요. 옛날 돼지 기르는 것 보고 깨끗하게 키우는 방법을 말했어요.” 젊은 외국인 신부의 말이 먹힐리 만무. 5년동안만 제안했다. 농사는 제주인들이 잘하지만, 목축만은 자신있었다. “제주억새 있잖아요. 오월말쯤 칠월 중순까진 방목할 수 있죠. 그 이후 목초 영양가 없어요. 그때 이 봄부터 가을까지 모든 목초를 풀을 바꿔서 심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상한 말 하지마라. 여러 가지 제안해도 받아 주지 않았어요. ‘마이동풍’!”

# 4H클럽- 신용협동조합-호스피스…

광활한 성 이시돌 목장. 어떻게 이 땅을 일궜을까. 제주사람들과 섞여지기 시작한 맥그린치 신부. 5년 지나 그가  맨먼저 한 일은 4H클럽. 학교를 못간 젊은이들한테 매주 현대식 영농교육을 했다. 당시 경기도 4H클럽에서 임신된 돼지 한 마리를 샀다. 헌데 키울 곳이 없어서 한림성당 옆 조그만 마당에 돼지 우리로 초가집을 지었다. “땅도 없고. 돈도 없지. 거기 임신 돼지 한 마리 넣고 4H클럽 남자 부원들한테 관리하라.” 문제는 냄새였다. “성당 신자들이 여름되니까 아름다운 향기가 나잖아요.” 그 돼지가 열 마리를 낳았다. 신부는 아이들과 계약을 했다. “집에 가서 길러라. 그거 새끼 나면 두 마리 상환해라. 그 대신에 나머지는 자기 소유다.” 와중에 돼지가 집안잔치로 쓰여져 버려 우는 아이도 생겼다. 그 식으로 양돈사업을 현대화 시켰다. 어떻든 땅이 필요했다.

“저기 정물 오름 아래 우물있어요. 꿩 사냥 갔다가 봤어요. 옹포 할아버지를 만나 땅 팔아달라고하자 돌밭, 못쓰는 땅 산다고 해요. 3000평은 지금 돈으로는 1500원. 돼지 기르기 위해서 땅 사놓고. 그 땅 사니까 얼마없어 다른 할아버지가 나타나 내 땅도 사라고해요.” 사제가 크게 웃었다. 그 장면이 떠올랐던게다.

“돈 없잖아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밤늦게 가족들한테 땅 살돈 보내라 보내라 이사람 정신 나갔다고. 천주교 선교사로 나갔는데 땅 산다고. 또 돼지 살 돈 보내라. 가족 친지 동창, 미국 교포들, 친척 한테도 모두 5달러 10달러 보내라. 우리 집 부자 아닙니다. 조금씩. 땅 샀죠. 소문났어요. 미친 외국놈이 쓸데없는 땅 산다고. 돌밖에 없는 땅을. 다음 사람도 나타나 사라고 해요. 나 이렇게 큰 목장 세울 생각 없었어요.” 황당했을 고향의 사람들이다. 그 아이들 가운데는 군대갔다온 다음 개척농가를 이룬 이도 있다. 

가난이 어디 쉽게 떠나겠는가. 우선 사람이 빚 때문에 죽는 일은 없어야했다. 그가 생각한 것은 신용협동조합. “비싼 은행돈 빌려 쓸 수 없잖아요. 담보도 없고. 신협을 한림에 세웠죠. 그것 때문에 빚 많이 갚았고 큰 도움됐죠.”

한때 이시돌의 상징, 초원 위 구름같던 양떼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 양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면양은 축사 필요없어요. 추우면 털도 더 잘나요. 왠지 제주 농민들은 양에 관심 없었죠. 그냥 다 분양했으나 실패했죠.” 경험있는 아일랜드 수녀들이 왔다. 이제는 사라진 한림수직. 이때 채용된 마을 여인들만 1300명. “그때 제주도 경제에 투자하는 사람 한사람도 없었어요.”

시골에선 병이 나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가 극빈환자 무료진료를 한 성이시돌 의원을 개원한 것은 1970년. 한림수직 수녀들 가운데는 의사도 있었다. 일반 병원이 많아지자 말기암 환자들을 위해 2002년 목장으로 복지의원 세웠다. 전국 유일의 호스피스. 큰 병원엔 호스피스병동이 있지만 진짜 호스피스가 아니란 것. 국가나 도차원에서 이제 호스피스의 개념이 바뀌어져야 할 때란다. 이시돌의 복지사업은 끝이 없다. 이시돌의 요양원, 젊음의집, 유아원 등이 그렇다.

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목장의 이익을 가지고 일해야해요. 비영리단체니까. 주주들 한테 이익나야 배당금 주는데 첫째는 농촌에서 일자리 만들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가난한 사람위해 자선사업하는 거죠.” 농민들 위해서 재단법인 농촌산업개발협회도 만들었다. 그가 이사장이다. “성 이시돌의 모든 것은 외국 사람, 천주교 소유권이 없어요. 이 땅의 사람들 위해서 처음부터 만들었죠.”

# 제일 귀중한 자원은 제주사람과 제주의 문화

인터뷰 도중 창너머로 대형관광버스가 휙 바람을 일으키며 지난다. “보세요. 길도 없었는데 길도 생겼잖아요. 이렇게 발전한 것은 장단점이 있어요. 여기 제주마을 중산간 마을 바닷가 마을 중심에서 관광업이 발전시키도록 해야하는데, 이 양반들이 생각한 것은 호텔이나 라스베가스 카지노하고 경쟁해야 한다는 착각이죠. 여기 있는 자원은 무시하고 없는 것하고 경쟁할 수 없잖아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제주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족 관광으로 가야해요. 후회할 일 하고 있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제주사람. 제일 귀중한 자원은 제주사람, 제주어, 제주음악, 제주문화입니다. 사람들 의식이 바뀌어져야해요. 제가 가족과 오스트리아 여행 갔을 때는 마을에 머물러서 수시간동안 거기서 자유롭게, 마음대로 산책하면서 돌아다니면서 마을사람들과 얘기했어요. 그것만 지금도 남거든요.” 이 대목에서는 예리하면서 단호했다. 

그는 가난한 제주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린다. “나 여기와서 돈도 없고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우체국 통해서 먹을거 70달러 받았어요. 한림 신자들 가난한 25명 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나에게 자기 먹는것 나눠주었죠. 계란 가져왔죠. 보리밥 나눠줬죠. 자리젓도. 난 제주사람들 그래서 알게 됐어요. 관광객들은 제주사람 몰라요.”
그는 이시돌에서 사진찍는 신혼부부가 보이면 가다가 차를 멈춘다. “깜짝 놀라요. 외국인이고. 제주도 와서 처음 얘기하는 것 같다고. 제주사람하고 한번도 얘기한 적 없고, 제주말도 들은 적 없고, 버스에서 내리고 오르고하다가면 사실상 제주 방문한 사람 아니거든요. 기념품 가게 사람들만 손님하고 얘기하죠. 택시기사하고만 얘기하고.” 처음은 7년에 한번, 이제는 4년에 한번 고향에 갔다온다는 맥그린치 신부. 제주도 관광해보셨냐고 하자 돌아온 답, “저 관광객 아니거든요.” 제주사랑이 넘친다.

이 기도와 사랑의 사제는 요즘 휘청이는 경제로 성이시돌 목장도 타격을 입고 있어 마음 아프다. 허나 청정 성이시돌목장우유에 대한 확신은 변함없다. 모든 농가가 유기농을 추진해야 한다고 본다. 1966년 아일랜드 한 방송에서 직접 제작한 영상속의 맥그린치 신부. 수려한 그의 이십대 얼굴에는 열정이 넘친다. 직접 돈사를 만드는 모습, 당시 한림수직의 길쌈하는 제주 젊은 여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 젊은 사제도 이제 제주에서 황혼. 한 인간의 힘이라 하기엔 말할 수없는 것을 일궜다. 허나 단 하나도 소유하지 않는 사람. 한국명 임피제. 이미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품은 맥그린치 신부. 이제 제주도를 한바퀴 둘러볼 생각이란다. 오름자락 아래 선 사제의 미소가 참 맑다.

“나는 천주교신자로서 사람들 붙잡고 성당 나오라 안해요, 저자신은 의무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한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온 건데요. 우리다 사랑하자 모두다 인간이란 사랑해야지. 사랑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죠. 종교는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어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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