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돌투성이, 여인들이 보초서고 바람이 두렵지 않은 섬, 제주도

   
 
 

비양도의 노을

 
 

노동력이 부족한 섬

하나의 사건은 지역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건들은 유기체처럼 얽혀있어 하나의 거대한 체제 속에서 잉태하고 출몰한다. 그래서 '사건은 먼지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언제나 의미심장하다.

사건이란 하나의 사회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현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4·3이 단순한 지역사가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축과정에서 발생한 세계사의 결절점에 다름 아니었던 것처럼. 섬의 역사는 안팎으로 저항한 세계사였다.

지배자들의 착취의 역사였고, 외세 침략의 굴종을 거부한 저항의 역사로서, 비록 섬의 힘은 미약 했지만 그래도 자주성을 얻고자 투쟁한 역사이기도 하다.

섬 자체가 저항사였다. 섬의 저항은 도망부터 시작되었다. 현실의 삶에 희망이 없을 때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 현실의 부정을 막기 위해 지배체제는 이데올로기를 동원하고 형벌로 다스렸다. 조선시대 200년 동안의 출륙금지령은 섬사람들에게 가해진 잔혹한 형벌이었다.

그것은 섬의 취약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구 유출을 막고 생산력을 높이려는 지배체제의 노예 프로젝트와 다름 없었다.

섬에는 사람과 다른 두 짐승이 함께 살고 있었다. 섬사람들은 이 두 짐승을 돌보기 위해 거지처럼 살아야만 했다. 특히 검는 소는 종묘의 제사에 희생으로 바쳐야했기 때문에 다른 짐승보다도 더욱 까다롭게 키워야만 했다. 희생의 쓸 검은 소가 비쩍 마르지 않게 '테우리(牧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키워야 한다. 그러나 섬의 토양과 기후는 맘대로 키울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천신(薦新)의 계절이 다가오면 테우리들의 걱정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수령들의 닦달이 심해지면서 제대로 키우지 못한 책임을 테우리에게 물었다.

섬에 가뭄이 계속되고 기아가 찾아오면 섬사람들은 참다못해 죽음을 각오하고 소와 말을 몰래 잡아먹었다. 직접 소와 말을 잡은 사람은 교수형을 당할지언정 눈앞의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불리 먹는 것을 택했다.

도살(盜殺)이 탄로 나면 주모자는 교수형을 당하고 그 고기를 얻어먹은 가족들과  일행들은 곤장을 심하게 맞고 육지의 구석진 지방으로 도형(徒刑)을 위해 섬을 떠나야 했다. 바다를 봉쇄한 것은 바로 도망자와 도형자(徒刑者)들이 늘어나면서 지배계급을 먹여 살릴 노동력이 부족한 때문이었다.

돌섬

돌섬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거친 환경을 이겨내는 것이 사람의 능력 중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섬에서는 발 뿌리에 차이는 것들이 모두 돌이었다.

그래서 제주 여인들은 짐을 머리에 이지 않고 등에 짐을 지고 땅을 보면서 걸어야 했다. 물 긷는 용기도 귀중한 물을 쏟지 않기 위해 목을 좁게 만들었다.

이 물 긷는 용기를 '허벅'이라고 하는데 제주에만 있는 매우 특별한 용기이다. 이 허벅은 가뭄이 많고 물이 부족한 섬의 풍토를 말해주는 도구다.

마을은 해안 가까이에 있다. 한라산에서 스며든 물이 바다 해안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마을에 빈번하게 왜구의 침입이 있더라도 이를 감수해야만 했다.

섬의 여인들에게 비중이 큰 노동은 바로 물 긷는 일이었다. 그녀들은 새벽에 일어나 해안가에서 물을 길어 항아리를 채우고는 집을 나가 노동을 하고 돌아온다. 다시 저물녘에 돌아와 빈 물 항아리를 채워야만 했다. 그만큼 제주는 물이 귀한 섬이었다.

돌은 제주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다. 돌로 만든 용기들이 삶의 언저리에 꽉 차있다. 화장실도 돌이고, 돼지 밥그릇도 돌이다. 구르는 돌로 밭담을 쌓아 바람을 막았다. 돌로 집을 만들고, 우물을 만들었다. 왜구를 방비하기 위해 섬 둘레를 돌로 둘렀다.

제주사람들은 이것을 환해장성(環海長城)이라고 불렀다. 환해장성은 한라산 남쪽 해안절벽이 있는 곳만 제외하고 전역에 걸쳐 건설되었다. 고려시대에 둘러지고 왕조마다 해안 방어를 위해 보강했는데 그 형상이 긴 용과 같았다.   제주의 무덤 또한 돌담으로 울타리를 둘렀다.

이 '산담'이라고 부르는 돌담은 조상들의 무덤을 말과 소로부터 보호하자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그 돌담 안에는 귀여운 동자석이 있었다. 쌍으로 세우진 동자석들은 무덤의 영혼을 지키거나 심부름을 위해 세웠다. 섬은 온통 검은 돌투성이었다.    

   
 
 

환희

 
 
여자의 섬

섬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다. 제주의 토호(土豪)들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육지의 관리나 유배자들에게 자신의 딸들을 첩으로 바쳤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계급의 수직 이동을 꿈꿨다. 하위 관리들의 딸들은 유배인들의 수발을 드는 시종으로 보내는가 하면, 고위층 유배자들의 눈에 띄도록 힘을 기울였다.

제주의 여자들의 삶의 방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잠수 물질이었다. 이 잠수 물질은 밭 노동과는 달리 순수한 노동력만으로 수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미역과 해산물을 땄다. 그들이 따온 제주 바다의 미역은 매끄럽고 맛이 좋아 전국적으로 인기가 좋았다.

미역을 말리는 것은 잠녀들의 일상 중 신나는 일이었다. 그 미역은 육지로 나가 곡식으로 바꿀 수 있는 화폐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녀들은 반 벗은 몸으로 물질을 한다. 이는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적 관념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잠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잠수 물질에서는 반 벗은 몸이어야만 했다.

옷을 모두 입으면 물속으로 잠수하기가 불편했고, 바다 속 돌과 돌 사이를 헤엄치며 지나가야 하는 잠녀들의 옷은 최소한의 의복 형태가 돼야 자유롭다. 부끄러움보다는 생존을 위한 경제가 우선이었다.

섬에서는 여자들도 보초를 섰다. 성정군(城丁軍)에 부족한 남정(男丁)들 사이에 여정(女丁)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들이 보초를 서는 것은 여자가 강해서가 아니라 남자가 너무 부족해서였다.
섬의 여자들은 외로움이 많았다. 남편이 죽으면, 수절하기보다는 다시 재가(再嫁)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욕망을 속일 수 없어 두세 번째 첩으로 살더라도 부끄러움을 몰랐다.

어떤 때는 육지에서 오는 원병들과 짧은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유교의 이데올로기는 그녀들에게 사치에 불과했다.

바람섬

한라산 북쪽에는 빗자루같이 생긴 나무들이 많다. 그 나무들은 거의가 바닷가와는 반대로 한라산 방향으로 누운 채 자라고 있다.

제주의 바람은 제주의 생태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다는 오래지 않아 '늦(녹조)'이 낀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은 태풍이 불지 않아도 걱정을 한다.

태풍은 바다의 수온을 내리게 하고, 물밑의 가라앉은 땅의 이물질들을 뒤집어 깨끗하게 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바람은 신을 데리고 오기도 한다. 잠녀들이 모시는 바람의 신 영등할망이 바로 그 여신이다. 영등할망은 잠녀와 어부들을 수호하고 제주 바다를 풍요롭게 해주는 이로운 신이다.

바다를 지키는 요왕(용왕)신과 더불어 잠녀와 어부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소중한 신이다. 이 영등할망이 방문하는 기간에는 잠녀들과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지 않는다.

이 기간에 제주바다는 험하고 거칠어진다. 이 때 영등할망은 바다에 해산물의 씨를 뿌리고 바다의 해산물을 자라게 한다. 어부와 잠녀들은 영등할망의 고마움을 영등굿으로 보답하고 후하게 대접한 후 성대하게 환송했다.             
   
땅에는 이어도가 없었다  

섬의 현실은 이상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는 이상세계의 존재를 믿었다. 그곳이 어디든 상관하지 않았다. 고달픈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야말로 바로 이상세계였다.

그래서 섬은 무속이 발달했다. 무속은 사람들의 현실적인 아픔을 어루만져 주기 때문에 흥성할 수 있었다. 섬에 '절이 오백이고 당(堂)이 오백'이라는 것은 섬의 희망이 없다는 증거와 무엇이 다르랴. 종교는 마약처럼 민중들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종교는 바로 현실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을 꿈꾸는 현실의 삶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욕구에 기생했다. 그러나 언제나 허구를 만드는 것은 자신의 현실이었다.

그래서인지 섬사람들은 바다 너머 이어도라는 이상세계를 마음에 담고 평생을 살았다. 물로 갇힌 섬의 억압적 마음이 물마루 너머 새로운 해방구를 꿈꾼 까닭이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섬의 이어도는 바다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바다 그 자체였다. 바다는 섬의 생명을 키웠고, 죽음을 거머쥔 삶의 높은 고지(高地)였기에 너무 가까이 있는 나머지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다시 섬의 바다는 핏빛 햇살을 삼켰다. 그러기를 수억 번, 바야흐로 바다는 시간을 머금었고, 세계의 시간과도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섬의 얼굴이 여러 번 바뀌고 섬사람들도 교체되었다.

결국 섬은 봉건적인 때를 벗으면서 세련된 자본주의 의상을 걸쳤지만, 섬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새로운 세계체제 속으로 섬은 잠기고 있었다. 

>끝<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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