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잠녀를 만나다...울릉도 독도의 제주잠녀들(3)
울릉도 죽암마을 김춘열 할머니
1년 채우지 못한 독도 작업…'미역소금국' 맛 아직도 입맛 씁쓸
'보재기'라 불리며 구경거리 돼도 마음만은 언제나 고향 바다에
한 길 사람 속도 읽기 어려운데, 열 발 스무 발 아래로 치닫는 바다 속사정을 어찌 다 알까.
멀리 타향 바다에 삶을 의지하며 살아온 그녀들의 얼굴을 뒤덮은 주름은 그냥 세월만은 아니다.
'주린 배만이라도 채우리라' 이를 악물었던 20대 제주 잠녀는 울릉도행 배에 몸을 실은 채 두번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그게 벌써 반 백년이 훨씬 지났다.
# '고생'이라는 말 기억하기도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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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넋을 놓은 채 목숨줄을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이곳(울릉도)까지 왔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넋두리처럼 쏟아내는 말은 딱지가 떨어진 뒤 보기 싫게 남은 흉터만 같다.
울릉도 죽암에서 만난 김춘열 할머니(73)가 고향을 떠난 지 올해로 53년이 됐다. 혈혈단신 독도행을 택한 잠녀들도 많았지만 가족이 있는 잠녀 중에는 남편과 자식, 아기 업개까지 데리고 배를 탄 경우도 많았다.
김 할머니도 남편과 딸·아들 두 남매와 함께 일이 많고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쫓아 울릉도에 갔다.
'3년만 고생하자'며 아직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갔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울릉도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혼자 두 아이를 돌봐야하는 형편에 좀더 돈이 되는 독도 작업은 염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도 한 1년 붙여서 일을 하면 목돈을 손에 쥘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어머니의 힘든 사정을 바로 옆에서 봤던 자식들은 지금 어머니의 든든한 기둥이다.
오래지 않았지만 독도 작업에 대한 기억은 우울하다.
김 할머니는 "누가 큰 돈을 준대도 그 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하고 겨우 운을 뗐다.
김 할머니는 "잠이라고는 굴에 가마니를 깔고 토막잠을 자는 게 고작이고,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다"며 "작업해 놓은 미역에 소금간만해서 국을 끓여 먹었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그때 미역국 맛이 느껴지는 듯 싶어 입이 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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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던 기억에 5년 전 대장암 수술까지. 이제는 물질을 손에서 놓을 만도 한데 제주 어머니의 힘은 대단했다.
취재팀이 찾아간 날 역시 근처에서 미역 작업 중이었다. 젖은 옷을 제대로 갈아입지도 못한 채 고향에서 찾아온 취재팀을 반갑게 맞아줬다.
독도 물질이며 최근 근황을 묻는 말에 대꾸를 하면서도 몇 번이고 고향 이야기를 묻는다. 물빛 고운 바다며 비양도까지, 김 할머니의 눈에는 어느새 고향 바다가 한가득이다. "예전 비양도에서 물질을 하면 전복만 한 망태기 가득 잡았는데…"말꼬리가 흔들린다.
소중이를 입고 물 속에 뛰어드는 모습이 구경거리가 된 것도 모자라 울릉도에서는 잠녀들을 '보재기'라고 불렀다. 1953년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에도 잠녀라는 의미로 '보재기'란 말이 쓰인 것을 보면 제주잠녀의 울릉도·독도행이 꽤 오래된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멀리까지 나가 오래하지도, 큰 돈도 벌지 못하지만 물질을 놓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죽고 나면 울릉도에 잠녀가 있었다는 걸 누가 기억이나 할까".
김 할머니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울릉도에서 잠녀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이제는 이곳이 더 고향 같아"하며 아쉬움을 감추던 김 할머니는 집을 나서는 취재팀을 맨발로 배웅했다.
몇 번이고 손을 흔들고 들어가 쉬시라는 말을 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 할머니는 '제주 말은 벌써 잊고 그곳 사람이 다 됐나' 싶지만 마음만은 늘 제주와 함께였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