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일본 지성 잡지「세계(世界)」편집장 오카모토 아츠시

   
 
 

 일본 이와나미 서점 발행 「세카이」 편집장
오카모토 아츠시(岡本 厚)

 1954년 도쿄출생. 일본의 진보적인 대표 출판사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계열의 잡지 월간 「세카이(세계)」의 편집장. 와세다(早稻田)대를 나와 1977년 이와나미서점에 입사. 「세카이」에서 정치 안보 등을 담당해왔다. 지난 1988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단독 인터뷰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와 함께 일본교과서의 '오키나와 현민 학살에 군 관여' 내용 삭제에 항의하는 집회를 공동개최했다. 그는 일본내에서도 친한파에 속한다. 대학 시절 「세카이」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T.K생'이란 필명으로 연재한 '한국통신'을 읽었고, 김대중 납치사건 때는 한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열린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편집인회의'에도 참석한 바 있다.

 
 
70년대 일본이 한국의 아픔에 공감해준 일이 있었다. 그것은 한 시사잡지였다. 일본의 지성이라면 한권쯤 끼고 다닌다는 이와나미서점이 발간하는 월간 「세카이(世界)」. 우리에겐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함께 벌여준 진보적인 잡지로 기억된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 열정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일조했던 것. 이 잡지의 편집장 오카모토 아츠시. 그는 30년 이상을 「세카이」에서 일하고 있는 이와나미 사람이다. 폭염 속에 이와나미출판사의 편집국 제작국 등 직원들과 함께 제주를 찾은 오카모토 편집장. 그는 제주출신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의 「화산도」등을 통해 제주도의 역사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실제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제주의 아픈 역사 앞에서 비감어린 표정을 지었다. 제주4·3평화공원에서였다.

# 「세카이」 73년부터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연재

"「세카이(世界)」는 리버럴하죠. 70년대 초반 유신때 박정희대통령을 비판했죠. 지금이 그 당시라면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73년부터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 15년간 전세계로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민주화운동사의 한페이지로 기록될, 'T.K생'이란 이름으로 쓰여졌죠."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가서 삐라 같은 것을 갖고 오면 후일 이름이 밝혀진 지명관 교수(한림대 석좌교수)가 그것을 쓴 것. (지교수는 지난해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창비)을 펴냈다.) 이 글은 일본은 물론 해외에까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외압은 없었을까.

"그렇습니다. 외압도 상당히 많았지요. 그 당시 편집장에게 욕설을 하거나, 전화 감시같은 것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와중에 한국에서는 꼭 한국에 한번 와달라. 한국의 발전상을 한번 봐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번 초청이 있었지요. 한국정부에서 소송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마 그 내용들이 사실에 가까운 내용들이어서 소송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세카이」는 특히 냉전 분위기가 지속되던 1970~1980년대는 정기적으로 북한방문기를 싣는 등 다른 매체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과감한 계획을 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도 집요하리만치 예민한 관심을 표명해 왔다.

이와나미출판사는 특히 한국의 작가들 작품을 왕성하게 출판한다. 최근엔 제주출신 재일정치사상가 이정화 편(編) 「잔상(殘傷)의 소리-아시아·정치·예술의 미래로」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회성 현월 유미리 김석범 김시종 등 재일 한국인들이 활약하고 있고, 일본작가들 쪽에서도 그렇고 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김석범 선생의 경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산도」를 얼마나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재일 상공인들보다 오히려 이런 문학자들이 끼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큰 것 같습니다."

# 김대중 납치사건이 가져다준 운명

일본 지성의 잡지 「세카이」 편집장 오카모토. 그는 왜 한국 문제에 유독 관심이 많은가. 그의 표현대로 '별 특징이 없는' 평범한 중산층 대학생 오카모토를 한국으로 눈을 돌리게 한 것은 대학시절.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진 사실을 알게된 것. "그때 납치사건을 알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한국에 대한 책도 읽으면서 한국을 알기 시작했지요. 그러다보니 식민지시대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직접 삐라를 뿌리면서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죠. 그때 한국에 와서 잡힌 와세다대출신 유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을 위한 구명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그의 미래는 이때 굳어졌다. 이러한 예민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잡지를 출간하는 곳이라면 생을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미련없이 이와나미 입사를 결정했던 그는 결국 1996년 편집장의 자리에 앉았다.

자연과학은 잘 모르지만 모든 분야, 즉 인문분야 정치 법률 경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오카모토. 그는 "편집장은 숱한 책을 읽어야하고, 관심사가 다양해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가령 이란문제를 두고도 종교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단다.

그가 입사할 당시 이와나미서점은 직원수만 300명. 1913년에 창업한 일본의 종합 출판사 이와나미서점은 학술, 고전, 문학, 전집, 신간, 문고, 사전, 아동서, 잡지 등 현재 연간 약 500권의 책을 발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200명 정도로 줄었다. 이와나미서점이 1945년 12월에 창간한 「세카이」. 창업주는 왜 이 잡지를 발행했을까. 4년후면 100년을 맞는 일본의 대표적인 이와나미출판사. 그 성공비결과 「세카이」의 정신은 무엇일까.

# 출판통해 전쟁 막고 싶었던 이와나미의 정신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왜 전쟁을 막지 못했을까. 주변의 친지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무언의 항변을 하기 위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출판을 통해 전쟁을 막고 싶었다는 것이지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해야 한다. 다음은 민주주의를 지켜야한다. 이것은 전쟁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우리가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으로서 아시아, 동남아시아라든가에 대한 반성과 배려, 화해, 이런 문제를 테마로 해서 「세카이」가 탄생됐습니다."

종전후, 일본사람들은 가해자 의식보다는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혔다는 것. 전쟁터에서 많이 죽고, 원자폭탄이 떨어져 죽었다는 피해자 의식이 많았단다. 왜 그랬을까.

"전쟁에 직접 참가한 당사자들이 사실대로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일깨워 주기 시작한 것이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사이였는데, 그렇게 하면서 전쟁에 대한 부분, 가해자로서의 조명을 하게 된 것이고, 중국, 동남아시아문제를 조명해갔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남은 것이 아무래도 한반도문제였죠."

한반도는 어떤 차별의식 같은 것 때문에 가장 늦게 조명하게 된 것 같다는 오카모토. 그렇다면 지금은 그러한 시도가 끝났는가? 돌아온 답. "전혀 그렇지 않지요. 우선 한반도 문제를 바라볼 때 핵심은 북한문제. 북한에 대해 가장 적대시하는 것이고, 거기엔 차별의식이 들어있습니다. 아직도 계속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중국과 대만은 굉장히 사이가 좋아졌는데, 한국에서도 이 문제를 잘 풀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 이와나미서점의 성공비결은 리버럴한 것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아무래도 성공의 비결은 최고 지성들의 원고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나쓰메 소세키 등의 작품과 훌륭한 필진들을 포진하고 있었던데 있습니다. 한발 앞서 문고, 이와나미 신서 등으로 차별화했지요. 리버럴한 것, 자유분방한 출판 지향점, 자기만의 생각만이 아니라 남의 생각은 뭘까하는 것, 이것이 성공비결이 아닌가 합니다. 아동서도 출판하고 있어 독자층이 다양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세카이」의 존재이유는 분명하다. 일본사회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신문 월간지 등 저널리즘이 없거나 저널리즘 정신이 없어진다면 상당히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한때 「세카이」 전성시대였던 1950년대, 이 잡지는 20만부 정도 팔렸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 잡지는 인기였다. 허나 지금은 6만부 정도로 떨어졌다. 「세카이」가 그렇게 잘 팔리던 시기는 텔레비전이 없었고, 라디오와 신문, 잡지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고 그는 분석한다. "1960년대까지는 사람들이 나라걱정, 사회걱정이 중심이었으나 그 이후 가족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라생각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러한 현상은 한국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최근 「세카이」 역시 전세계적인 금융위기 여파를 맞았다. 광고 등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어려운 상황. 전자출판, DVD, 인터넷으로 불법 다운로드 받기 때문에 출판사의 매상도 뚝 떨어졌다. 결국 인터넷으로 인해 인쇄매체의 위기가 온 것일까. 허나 그는 다른 생각이다. "전자콘텐츠 같은 것이 발달해서 아마 그쪽으로 많이 가겠지만 종이책의 생명은 굳건할 것"이란 것. 앞으로 10년정도 있으면 그러한 것들이 판명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도 우리 세대는 아무래도 책으로 보는 것이 훨씬 편하지 않을까요?"

# 제주도, 역사성을 잃어버리면 안돼

"제주도가 굉장한 관광지로 정비돼 있더군요.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일본도 그렇지만 실질적인 전적지 등을 보지 않고는 이런 일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제주도가 평화스런 섬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역사성을 잃어버리면 안되지요. 역사적인 인식을 잃어버리면 방향성을 상실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해 잊어버리면 안되지요. 4·3사건이라든지 여러가지 역사적인 일들, 이런 것도 꼭 기억을 하고, 이 기억을 바탕으로 앞으로 이 섬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설까. 그는 제주도와 비슷한 운명을 가진 오키나와 문제에도 유독 관심을 갖는다.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 4·3을 생각하는 모임대표 조동현 등과의 교분도 두터운 그는 제주에 대한 관심이 일찍부터 많았다. 그런 애정으로 밟은 제주섬의 얼굴은 의외로 거칠지 않았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깨끗했다. 굉장히 잘 사는 섬같다. 그러나 아직도 안타까움은 남는다. "냉전초에 4·3이라든가 팔레스타인 문제라든가 대만2·28이라든가 발생했는데 한국은 아직도 이 문제가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만같은 경우는 많은 진전을 보였는데 한국은 안그런 것 같아요." 4·3평화공원이 그에게 던진 우수였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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