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득종

 

 

 

 

 

문필이 옛 법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들을 기록한 책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_」에는 고득종(高得宗,1388~1460)의 ‘자는 자부(子傅), 호는 영곡(靈谷). 본관은 제주, 태종(太宗) 14년 갑오(1414)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판서에 올랐다. 항상 수문전(水文殿)의 제학(提學)을 맡았으니 문필이 모두 옛 법에 가까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문전(水文殿)이란 왕에게 강의하던 곳으로 고려 초기에 설립된 기관이며 제학((提學)의 벼슬은 정3품직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조선 세종 때에 벼슬이 한성판윤(判尹·서울시장)에 이르렀다. 한성부 판윤에 있을 때 경사자제과(京司子弟職科)를 설치하여 제주에서 올라오는 관리를 우대하였다.

그는 상호군(上護軍) 고봉지(高鳳智)의 아들로 조천읍 교래리에서 태어나 제주성 남쪽 오현단 앞에 살았다. 지금은 그 터에 장수당이 세워져 있다.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 ‘그의 성품은 지성으로 효도하며, 문장과 필법이 고상하고, 기품과 절조가 뚜렷하여 평장사(平章事)의 문풍이 있었다’ 라고 전한다.

그는 1413년 3년 상(喪)을 시행한 효행이 알려지면서 생원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포상을 받은 고마움의 표시로 말 3필을 조정에 바치자 조정에서는 뜻이 가상하다고 하여 그에게 쌀과 콩 35석을 내려주었다. 한번은 고득종이 궁중의 술을 담당하는 직책인 사온서령(司醞暑令)으로 있을 때 왕은 그를 경차관에 임명하여 제주에 보냈다. 목적은 현미(玄米) 600석, 목면 150필, 여복(女服) 8벌을 가지고 금은기(金銀器)를 사기 위해서였다. 중국에 보낼 조공품을 충당하는 심부름이었다. 조선 초기 제주에는 금은기가 많았다. 이 금은기는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유배 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가뭄이 들어 곡식이 귀해지면 금은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관아에 콩이나 쌀로 바꾸기 위해 청원하기도 한다. 관리들은 때때로 제주에 있는 금은기의 양과 품질을 조사하였다가 필요시 전라도에서 콩과 쌀을 수송해 와 그것과 맞바꾸기도 했다. 4개월 동안 고득종은 제주에서 은(銀) 1771냥을 모을 수 있었다.

1429년 고득종은 한라산에 목장을 축조하도록 허락을 받아 목장내 거주민 60가구를 밖으로 이주시켰다. 그 후 마소를 방목하게 하여 목장을 번성하게 하였다. 특히 소의 출륙을 금지하고 3년에 1번씩 관에서 농부들이 자원한 소를 사서 출륙하도록 건의 한 것은 제주민들이 농사를 지을 소가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소 거름이 필요한 화산지대 경작지에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고득종은 명나라에 두 번, 일본에 1번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유배형을 받기도 하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1460년 향년 72세로 생을 마감했다. 고득종이 죽자 세조는 그를 원종3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기록하라는 전지를 내렸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했다.

현존하는 그의 글씨로는 홍화각(弘化閣)이라고 쓴 편액이 있고, 그가 지은 글로는 홍화각기(弘化閣記)가 전하며 그 내용이 판각에 새겨져 있다. 홍화각은 관부(官府)가 화재로 소실되면서 그곳에 보관 중이던 문적(文籍)이 타버리자 세종 17년(1435) 겨울에 제주 안무사 최해산(崔海山)이 세운 건물이다. 고득종의 홍화각기(弘化閣記)는 이원진의「탐라지(耽羅誌)」에 전해오는데 홍화각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어 무척 흥미롭다.

“관영(官營)이 불에 타자 주거할 곳이 없음을 탄식하고, 머리 깎은 죄수와 보초서는 무리를 시켜 무너진 절간의 재목과 기와를 모아서…집을 짓고, 그 집 수는 모두 206간이며, 집마다 독립되어서 서로 붙어있지 않게 한 것은 화재의 위험을 예방하고자 함이다…여러 염려하는 자가 이르되 홍화각에 올라 방탕하게 노는 일 없고, 방종한 욕심이 없어 위임된 책임의 완수를 다짐하고 항상 왕의 덕화를 넓히며, 민정에 통달함으로써 마음을 삼으면 주(周)나라의 선정(善政)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제주도민은 마땅히 복 받을지어다. 그러한즉 어찌 홍화(弘化)로써 이 각(閣)을 이름 하지 않으리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본 고득종

‘땅이 다함에 창망한 바다와 연하였고, 마루 창을 여니 푸른 산과 마주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해오는 고득종의 시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이 시를 통해 자연을 예찬하는 고득종의 문인적인 풍모를 조금이나마 알 수가 있다. 고득종이 안견(安堅․1418~?)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보고 예찬한 시가 전해오는데 ‘몽유도원도찬양 칠언장편시’가 그것이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 천리대(天理大)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매우 고매하고 격조가 높은 그림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노닐면서 본 무릉도원의 모습을 안견으로 하여금 3일 동안에 그리게 한 작품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안평대군의 나이는 30세, 안견 또한 신분은 다르지만 30세 전후라고 했다. 어찌 그림에 두 사람의 젊은 나이의 호기(豪氣)가 배어들지 않으랴. 󰡐몽유도원도󰡑를 일본에 가서 직접 본 이동주 선생은 “그림은 정말로 섬세하다. 그럴 뿐 아니라 선묘(線描)가 미묘하게 변화하며 조그마한 먹칠이 음영과 뉘앙스를 정확하게 표시한다. 왼편의 산수는 현실에 가깝고, 그곳에서부터 오른편으로 그림이 전개되면서 산봉우리와 내(川)는 신선의 나라답게 신비롭고 정갈스럽다. 한 붓의 실수도 없고 하나의 군선도 눈에 안 보인다. 수없는 선이 먹빛과 담채 속에서 무한한 변화를 보이면서 뛰어노는 것 같다…그림은 구도상 왼편으로부터 현실세계, 무릉도원의 입구, 중간경치, 마지막으로 꿈에 배를 보았다는 도원의 선경(仙境) 등 네 단으로 나뉘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안견의 자는 가도(可度), 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 주경(朱耕). 도화서(圖畵暑) 화원(畵員)으로 벼슬은 호군(護軍)이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정통하면서도 널리 알았고, 또 고화(古畵)를 많이 보아서 모두 요점을 잘 알았다.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아 절충하여 산수에 특히 뛰어났으니 지금 사람들이 안견의 그림을 아끼고 간직하기를 금옥같이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견은 유명한 명작들에서 그림의 핵심적인 요체를 취하는 것에 능통했다. 곽희, 마원(馬遠) 등 중국의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도 그대로 모방할 수 있는 ‘전이모사(轉移模寫)’의 대가였다. 이 전이모사는 남제(南齊) 때 사혁(謝赫·약 490~530년 활약)의 육법(六法) 중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로서, ‘고화(古畵)를 보고 옛 전통과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안견의 그림 솜씨는 신(神)을 전하는 솜씨가 있다”고 했고, 서거정은 “안견의 그림 솜씨는 천하에 또 없으니 웅대한 구상을 한 폭 수묵화에 담았어라” 라고 하였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이 그림을 그리고, 안평대군이 그림의 내력을 쓰고, 신숙주가 서문을 지었다. 이어 많은 문사(文士)들이 이에 화답했는데 제주인 고득종 또한 ‘몽유도원도찬양 칠언장편시’를 지었다. 문사들은 저마다 안견의 그림을 보고 자신의 감흥을 술회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필적으로 그 흥취를 남겼다. 이 그림에 화답한 시를 쓴 사람은 모두 21명으로 신숙주·이등·하연·송처관·김담·고득종·강석덕·정인지·박 연·김종서·이 술·최 항·박팽년·윤자운· 이 예·이현로·서거정·성삼문·김수온·천봉만우·최 유 등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제발(題跋)과 당시의 쟁쟁한 정치가와 문인들의 필적이 있다는 것 때문에 희대의 보물로 여겨지고 있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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