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해녀 양씨'주인공 오사카의 양의헌

 '해녀 양씨'입니다. 제주의 작은 어촌마을 골막바당에서 애기잠수가 되었습니다. 4·3의 와중에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가족사는 분단 한국의 얼굴이지요. 당시 87세. 장편 다큐 '해녀 양씨'. 드라마틱한 여인의 생은 한국과 일본에 알려졌고, 그녀의 슬픔은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그 여인, 해녀 양씨는 올해 94세. 그녀의 발이 되어주는 자전거가 그의 집 문전에 서 있습니다. 바깥양반처럼. 몸은 비록 쇠하나 놀랍게도 확실한 어조로 제주어를 씁니다. 한가위를 앞둬 그녀, 양의헌의 생과 만났습니다. 어느덧 초추에 든 오사카 조선시장, 홀로 사는 그녀의 방에는 자식들의 전화번호가 크게 붙여져 있었습니다. 자나깨나 한국과 북한, 일본에 흩어진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 모성애의 현신같은 이 제주도 어머니, 그녀의 삶과 아직도 생생한 물질얘기에 어느덧 오사카의 날은 저물었습니다.

   
 
 

 94세 제주출신 해녀 양의헌은

 1916년생. 제주시 동복리 출생. 열여덟에 결혼. 남편이 예기치않은 사고로 세상을 뜨자 세 자녀를 키우며 닥치는대로 일을 했고, 이십대에 일본 물질을 넘나들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의 공습을 피해 다시 고향으로 왔다. 제주 4·3 광풍이 휘몰아치자 일본으로 밀항, 재혼하면서 모두 7남매를 이뤘다. 2004년 국내외에 방영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해녀 양씨'의 주인공. 다큐는 재일동포 1세의 애환을 담고자 3년에 걸쳐 기록했던 재일조선인 고 신기수씨의 작업이 바탕이 됐다. 미완성 영화필름을 일본의 히마무라 감독이 이어받아 완성한 것. 또한 영화 가운데 북한의 영상은 그녀의 가족이 촬영한 것으로, 재일한국인, 일본인, 가족의 카메라에 의해 잡혔다. 식민지 지배와 남북분단, 4·3, 북송사업 등 이산의 아픔속에서 50대의 그녀와 80대의 그녀가 교차되면서 구성됐다.

 
 
# 대마도 물질할 땐 부산이 보였지

"저 쓰시마(대마도)엔 헌디, 그디가민 부산 봐레지는구나. 부산 보아져. 거기서 물질허는 해녀들 오리발이 보여. 발가락이." 대마도에선 부산이 보였습니다. 그럴때마다 곧 헤엄쳐 그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물질하다 보면 다섯시. 그제야 불 쬐면서 언 몸을 녹이면 저녁. 다음날도 아침 일곱시반에 물질채비를 완료합니다.

"아침 여덟시에 땅 소곱(바닷 속)에 들어강. 열두시 되어사 점심 먹으레 올라왕 하늘을 베리주(보주). 반도(밸트) 차고, 안경(수경) 썽 들어강. 물건 가득 허민 물 속에서 이걸로 두 번을 탁탁 치민 망사릴 내려. 난 머구리가 젤 좋아. 올라갔다 내려갔다 숨만 주민 얼마든지 허지. 이런 스봉(바지) 입언. 푸우푸우 얕은디선 거품이 부글부글. 파도가 젤 무섭주. 놀(파도)에 와당탕허민 사람이 저레 불려가지 안허냐. 저기 강 딱 떼려불민 여기 정강이가(무릎) 다 떠낸 그륵(자국)아냐. 물질헐때 다대겨불민(부딪히면) 양쪽 다리가 다 다쳐부런. 이거."

머구리배를 탔습니다. 무명모자, 무명 저고리, 바지 입고 입에는 긴 공기주입 호스. 물속 50m~100m까지 들어갑니다. 수동펌프로 공기 주입 5분내지 10분까지 잠수하다 올라오길 반복했습니다.

묻지않아도 저절로 험한 삶이 필름처럼 돌아갑니다. 그녀가 바지를 걷어 무릎의 흔적을 내보입니다. 지금도 그녀는 자전거를 몰고 아침이면 병원에서 물리치료 받고, 침 맞고, 약타고 옵니다. 영화에서도 그랬습니다. "나가 이런 힘든 일을 해야하나. 그래도 이렇게 힘든 일도 내 운명이라 여기자." 서러운 생각이 치밀면 물 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습니다.

 # 동료들과 다니던 쓰시마 물질

 쓰시마 물질. 마흔에 시작했습니다. 매해 3월에 가서 10월까지. 이미 눈앞엔 넘실거리는 그 바다가 밀려옵니다. 대마도는 전철로 열 한시간. 50명 넘는 제주에서 온 물질 벗들과 함께 갔습니다. "대마도 물질로 그때 돈 백만원은 벌엉 와. 배가 네척이나 되어. 한국사람들 천지라. 거기 가민 뱃물, 머구리를 했어.

 그렇게 대마도에서 물건해서 부산 가서도 팔고, 조금 벌었습니다. "머슴아를 낳았어. 여기서 도골도골 걷는디. 큰 형하고만 놔두고 물질을 갔지. 멜 바싹 몰령 설탕노앙 지져놓으민 성님 난 이거 안먹크라. 어머니가 저기가 돈벌엉오민 다른 것들은 주지말고 너허고 나만 도야지고기 상(돼지고기 사서) 먹자. 큰 아들이 그렇게 좋다. 부처님 닮아." 큰 아들덕에 그녀 마음놓고 물질했답니다.

 하루라도 쉬면 아이들 굶을까봐 죽어라 일만 했습니다. 지금도 장아찌, 마른 반찬이 고작인 그녀, 어머니의 밥상입니다.

 잠깐 영화속 그녀를 보니 고운 50대. 물질 후 다른 사람들은 시원하게 우유를 먹어도 그녀는 그것이 아까와 수돗물을 틀어서 시원한 물이 나올때 먹고 갈증을 달랬답니다.

 30, 40대 그녀는 쓰시마에서 부산으로 몇 번 건너간 적도 있습니다. 작은배로. 야간 밀항했다가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발소리 죽이고. 오사카의 한복지를 부산 암시장에서 판매하고 모시라는 데서 배까지 통째로 잡힌 적도 있지요. 오무라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 동복리, 골막에서 물질배워…결혼…4·3때 밀항

 해녀 양씨. 양의헌. 아들 다섯에 딸 셋. 8남매의 막내로 호강하며 컸습니다. 어릴 적부터 오직 물질 방법과 기술을 배웠습니다. 일곱 살인가 여덟살부터 골막에서. 열여덟에 조천 시집갈 때까지. 허나 젤 막둥이가 시집가서 세상없는 고생을 했습니다.

 "제주도에서 태왁으로 숨비엉 나오곡 들어가곡" 미역, 구젱기 전복들, 벗들과 조물었습니다. 조천 시집가서도 물질했습니다. "우리 아버진 족은년아, 공부도 허지말곡 물질도 허지말라. 공부도 기집애가 허민 안된다. 시집간디 돈도 없고 집도 없곡해도. 돈이 없어도 사람이 좋으면 되었다고 아버지가 권했습니다." 그 남편, 어이없게도 싸움 말리다 세상 떴습니다. 자식들만 남겨두고.

 "그때는 증명 들이밀면 안되어. 군대환 댕길때난. 난 동경 물질허는 모집에 오란." 그렇게 밀항한 것은 1941년경, 동료 30명과 함께였습니다. 2년쯤 물질 후, 태평양전쟁으로 공습을 피해 다시 고향으로 갔습니다. 얼마없어 고향엔 1948년, 생지옥 4·3이 터졌습니다. 견디다못해 다시 밀항. 1946년 생인 세살배기 딸 하나는 배에 태울 수 없어 이별이었습니다. 소리나면 발각된다했습니다. 우는 딸 친족집에 맡겼으나 그 딸, 고아원에서 컸다합니다.

 일본에서 재혼, 아이들이 불어났습니다. 그녀에겐 명절이 없었습니다. 생계는 그녀의 몫. 해녀는 직업이지만 부업으로 헌옷 수거, 재봉일, 콩나물다듬기 등 온 몸으로 일했습니다.

 "내가 팔십까지 물질했다. 이제 구십넷인디. 저디간 머구리허다가 미에끼서 10년을 했어. 나는 '심백은 하되 심사는 허지말자'. 야 여기오라. 여기도 전복 있고 구젱기가 있다. 나 조름에(밑으로) 와. 아이고 언니, 언니닮은 사람 처음 봤다. 좋아해. 소리로 허민 알아들으카부덴. 손짓하지. 그리 벌어 이 집을 구했다." 그 때가 고마워 어느 해녀 후배는 매일 그를 만나러 옵니다.

 # 오로지 자식들…힘든 물질 견딘 바다의 어머니

 "나가 저 영감 만나 참 힘들었다. 영감은 돈이고 뭐고 좋다고했지. 그래도 나는 아니라. 자식만 나민 안되고 돈이 있어야헌다. 입혀야지 공부보내야지. 그래서 물질을 간거라. 도둑질도 못허곡 허난 물질을 허연." 15년전 떠난 남편의 사진을 가리킵니다. 재혼해 서로 합하고 낳고 아들 다섯, 딸 둘이 되었습니다. 재혼한 남편은 총련의 조선학교 교육사업에 온 힘을 쏟던 이였습니다. 자식들은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자식들이 아버지 원망을 하면 꾸짖습니다. "아버진 훌륭한 일을 했다."

 그녀는 지금도 아이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시립니다. 총련 일 하던 남편의 뜻에 따라 1968년 차남, 3남이, 1976년엔 열여섯살 4남이 북송선을 탔습니다. 1959년부터 일본에서는 9만명이 넘는 재일동포들이 북한의 귀국사업으로 북송선을 탈 때였지요. 생이별.

 북에서 보내온 3남 영재씨의 편지는 두고두고 잊지못합니다. "꿈속에서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파뜩 잠에서 깨어보니 밖에는 눈이 굉장히 많이 많이 쌓여있었대요. 가족들은 없었대요. 깨어보니 아무도 없었대요. 그런 꿈을 꾸었다는 편지가 왔지." 지금도 그 편지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이젠 동경서 대학교수 하는 막내아들도 있고, 손자 손녀들 그득, 모두 살만합니다.

 울면서 떼어놓고 온 고향의 작은딸, 그 딸과는 지난 2002년 기적같은 53년만의 고국 방문길에서 만나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한도 많고 원망도 많으나 서로 달랬습니다. "시국탓 아니냐. 우리 어머니 아버지 다 죽어불곡 산소라도 보고 딸도 만났주."

 # 내 살아서 남북이 정말 통일 안될건가

 21년전부터 북의 아들들을 만나러갔습니다. 니카타항에서 원산까지 36시간. 저축은 포기하고 바리바리 싸서 생활비를 전해주었지요. 큰아들이 마련해준 돈으로 87살, 언제다시 볼지모를 재회를 했던 북한가족들과의 영화속 상봉장면이 있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다시 다녀왔습니다. 지난 5월, 마침 북에 다녀올 거라고 너무나 들떠있는 그녀를 만났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이번에도 너무나 반가운 손자손녀들 만나고 왔다고 사진을 내놓습니다. 북에 갔던 세 아들 중 아들 하나는 먼저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합니다.

 "그 전엔 배가 다니난. 여드레 살안 왔다. 노동허고 어린애들 낳고 잘 살고 있었다. 갈 때가 기분 좋았다. 아이들이 축항에 내령 왕 옷도 돈도 가졍가. 옷도 20㎏밖에 못 가졍가. 욕심으로 이런것도 가졍갈 수가 없는가. 옷을 막 많이 넣었다. 예전엔 이부자리도 몇채 가졍갔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옷가지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흡사 희망의 존재처럼. 다음갈 때 갖고 갈 거라고 보여줍니다.

 그녀는 자나깨나 통일 생각입니다. "내 생각에 남북이 통일이 안될건가. 남북이 통일되면 저걸(옷들) 다 가졍가고, 통일이 안되면 다 불사를 수밖에 없어. 지금은 제일 큰 소망이 남북 통일밖에 생각허는게 없어. 지금 내가 아흔네살 아니냐. 살면 얼마나 사냐. 죽기전에 저것만 갖다주민 좋은디. 두 번만 갔다와져시민."

 지금도 환합니다. 제주도 고향 골막, 일본 남쪽 가고시마, 쓰시마, 에히메, 미에 등 일본 열도가. 누빈만큼 그 바다의 전복 소라 미역의 거처가 보입니다. "제주도 바당은 좋지. 여기 바당은 놀이 세어." 천성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그녀. 제주도의 풍토와 제주어머니의 기질을 그대로 간직한 그녀. 청춘의 파도를 들락날락 타넘은 그녀의 한 생이 굽이칩니다. 가파르게 한세기 가까이 가는 그 세월, 차마 다 담을 수는 없지요. 그녀가 문득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어도 사나아 이어도사나 아~ 이어도사나 아 우리어멍 날 무사난고 요물질허렌 날 나신가 이어도사나 좋~다 이어도사나아 이어도사나아…우리 배느은 잘도 간다 이어도사나 헤이~."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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