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 <전 제민일보 편집국장>

   
 
   
 
기자의 의제설정과 그 해석 기능은 보다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본란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바와 같이 신문이 언론인 것은 '현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안'을 찾아내고, 그것에 대해 '비판적 설명'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난 9월17일자 본란 '제민포커스에 거는 기대'의 연장선상에서 그 비판기능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제민포커스'는 제민일보의 대표적 해설기사입니다. 의제설정도 그렇고, 그 해석 또한 그렇습니다. 1면과 3면을 동원하는 등 지면의 양도 그 어떤 기사보다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민일보의 대표적 해설기사로서 손색이 없느냐'는 물음에는 얼른 동의하지 못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해설기사로서 탁월한 게 없는 것도 아니지만, 1면과 3면의 내용이 중복되거나, 안타깝게도 시(是)와 비(非)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그 평면적 나열에 그치고만 기사도 없지 않습니다.

해설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무엇'보다도 '어떻게'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안의 내용과 그것에 대한 정확한 비판, 그리고 그 비판을 하게 된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해야 합니다. '해설기사'라면 일반적으로 '풀어 쓴 기사'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도 분명 '의견기사'입니다. 그래서 '사실적 요소'와 '의견적 요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이면(裏面)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그 이면에 도사린 허구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 때에만 그것이 비판될 수 있습니다. '허구성을 인식한다'는 말은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모순덩어리로 판명되고 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허구성을 파악할 때만이 '비판다운 비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비판이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어떤 입장에 대한 비판은 '또 하나의 입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무엇을 첨가하거나 왜곡하기 보다는, 그것의 정체를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여기서 대두되는 문제가 바로 '대안제시'가 비판의 필요충분조건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립니다. 그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대안없는 비판'은 한낱 '비난'일 뿐. 그건 비판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들은 비판은 문제제기로서 충분하다고 합니다. 저는 후자의 의견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제가 서두에 이야기한 '의견적 요소'는 최소한 '비판 즉 대안'입니다. 물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 그 자체가 궁극을 드러냄입니다. 특정 사안의 이면에 감춰진 허구성을 제대로 보고, 그 그른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비판은 이뤄집니다. 잘못된 것을 물리치는 것, 그 자체가 그대로 대안을 제시하는 일입니다.

비판을 제대로 하려면 기자는 스스로 해석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그 지평을 놓치지 않아야 그 본래 특성이 온전히 드러납니다. 그만큼 사회적 구성에 대한 높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비판을 한답시고 한 면만을 주장하는 것은 분명 독선입니다. 역시 기대가 큰 만큼, 그것에 비례하여 말도 많아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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