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심산의 제주올레 사랑고백] <6>제주올레 5코스 남원-쇠소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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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올레 제5코스에서 만난 부녀 올레꾼. 아침 햇살 아래 다정히 걷고 있는 두 부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 ||
풍광으로 보자면야 김진석의 올레가 훨씬 더 근사하지만 마음이 가 닿는 곳은 역시 내가 걸은 올레다. 본래 풍광이란 완벽한 타자(他者)로 자아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알프스의 그림 같은 별장보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오두막이 더욱 정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찍은 사진들 속의 자욱한 바다안개가 오래 되지 않은 추억을 선명히 일깨운다. 조금 걷다보니 내의를 축축하게 만들었던 그 습기까지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어떤 기억은 장쾌한 시각으로 우리에게 남는다. 하지만 시각이 오감의 전부는 아니다.
남원에서 쇠소깍에 이르는 제주올레 제5코스는 내게 촉각으로 기억된다. 머리카락에 배어있는 바다안개의 촉각, 허공의 거미줄에 송글송글 맺혀있던 습기의 느낌, 얇은 바지를 적시고 이내 내의까지 파고들던 기분 좋은 한기. 이 길은 또한 미각과 후각으로도 기억된다. 맑은 핑크빛의 모스카토 로제와 된장 베이스가 입맛을 돋우던 자리물회의 추억. 아 기억을 더듬다보니 청각도 되살아난다. 바다안개 저편으로 낮고 음울하게 깔리던 뱃고동소리, 뜻은 사상된 채 음향으로만 남아있는 누군가의 목소리, 아이들이 불어대는 비누 거품처럼 기분 좋게 터지던 웃음소리. 그 목소리와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가 이제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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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올레길에 흠뻑 빠져있다는 소설가 김주영씨가 길에서 만난 올레꾼들과 반가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속 야구모자를 쓴 이가 김주영씨. | ||
그러던 그녀가 돌연 제주로 발령을 받아 서울을 떠나게 되자 와인반에 뜻하지 않은 제주여행 붐이 일었다. 그녀를 위로 혹은 격려한다는 핑계로 우루루 제주로 몰려가 며칠 동안 와인을 퍼마시게 된 것이다. 내가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제주올레의 실체와 접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결국 나로 하여금 제주올레를 걷게 하고 이렇게 글까지 쓰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신명희였던 것이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모슬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제주에 정착한 다음 새로 구입한 아담한 경차를 끌고 내 숙소를 찾아왔다. 며칠째 홀로 걷고 있던 내게 올레의 동행을 자처한 것이다.
남원에서 쇠소깍까지 이르는 제주올레 제5코스를 나는 그녀와 둘이 걸었다. 와인으로 맺어진 다정한 오누이가 함께 걷는 길이었다. 제 아무리 소원했던 사람이라도 몇 시간을 함께 걸으면 마음을 열기 마련이다. 하물며 매일 같이 커뮤니티를 드나들며 서로의 안부를 묻던 다정한 오누이 사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녀와 무슨 말을 나누었던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말 따위야 아무러면 어떠하랴. 어떤 뜻에서 대화란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욱 중요하다. 그녀와 나는 무의미하되 다정한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나누며 그 길을 함께 걸었다. 행복한 소통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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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과 양말을 벗어 햇살에 말리고 있는 모습이 한가롭다. | ||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앉아 플라스틱 와인잔에 맑은 핑크빛의 와인을 가득 따른다. 행복은 굳이 발설할 필요도 없고 광고할 필요도 없다. 진정으로 행복한 존재는 그 자체로서 빛을 발한다. 나란히 앉아 안개 너머로 무심히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는 오누이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풍경이다. 산길을 걷든 올레를 걷든 상관없다. 나는 언제나 배낭 속에 와인을 챙겨 넣는다. 소주는 독하고 맥주는 무겁다. 야외에서 즐기기에는 와인이 제격이다. 다정한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걷다가 자리를 잡고 앉아 와인을 홀짝거리기에 가장 어울리는 곳이 바로 제주올레다.
위미의 동백나무 군락지 앞에서 행복한 약속을 한다. 한겨울에 동백이 활짝 피면 우리 여기 또 오자. 조배머들코지의 기암괴석 앞에서 한심한 약속을 한다. 다음에는 와인을 두 병 가지고 와서 이 앞에서도 한 잔 하자. 불현듯 허기가 느껴져 눈에 보이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려 하는 나를 그녀가 만류한다. 조금만 더 가요. 아주 맛있는 물회집이 여기서 멀지 않아요. 김진석의 사진과 내 사진 속 풍경이 유일하게 일치하는 곳이 단 하나 있다. 바로 검은모래사장으로 유명한 공천포의 한 음식점이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이 집의 자리물회가 꿀맛인 것은 단지 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망장포구를 지나고 예촌망을 지난다. 제5코스의 종점인 쇠소깍이 멀지 않다. 이 길이 끝나는 것이 싫어 발걸음은 더욱 늦어진다. 이렇게 느긋하게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야근과 격무에 길들여진 직장인다운 발언이다. 이렇게 살아야 돼, 더 느리게 살아야 돼. 평생 직장생활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천상 백수의 대답이다. 이윽고 쇠소깍에 이른다. 민물이 바닷물과 합쳐지면서 천상의 풍광을 연출해내고 있는 곳이다. 그 깊은 못 위에 도무지 가는 건지 마는 건지 판단도 안되는 테우가 한 척 덩그러니 떠 있다. 제5코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유유자적한 쉼표다.
/글 심산(작가·심산스쿨 대표)/ 사진 김진석(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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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소깍에 한가로이 떠 있는 테우. 세상에서 가장 느린 교통수단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