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추자도 어민 이정호

 선장의 꿈을 품고 통통배를 타던 열일곱 소년 어부. 섬속의 섬 추자도에서 태어나 이십대에 북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누볐다. 멀고 먼 바다를 돌아오면서 겹겹층층 파도같은 곡절이 어찌 없다하겠는가. 그 먼 항해길에 지친 그를 따뜻하게 받아준 것은 고향 섬 추자도. 겁 없이 늘 도전하는 추자도 바다사나이 이정호. 그는 어선주협의회를 만들어 추자어민들의 소득을 높인다. 베트남, 몽골, 방글라데시 등 이방의 선원들의 사랑의 가교역할도 한다. "바다는 인간의 미래, 어민들이 스스로 지켜야한다"는 추자도 어민 이정호. 바다는 또 하나의 대지. 마침 올겨울은 조기, 삼치가 대박. 황금어장이다. 조기잡이 어선들이 출항을 하자 추자바다는 온 몸을 뒤틀며 신음을 한다. 바다보다 먼저 깨어나는 바닷사람 이정호, 그의 바다의 삶을 듣는다. 갯내음 만발한 추자바당에서.

 # 이방의 선원들속 20대 자신을 보다

   
 
 

 추자도 어민 이정호는

 1952년 추자도 대서리 출생. 추자중학교 졸업. 선장면허 합격. 부산 고려원양 입사 선원생활. 1989년 추자도유자망어선주협회를 첫 시작으로 채낚기 협의회, 연안자망협의회, 낚시 유선업협의회와 통합, 안전조업 근로조건 개선 소득증대를 위해 2005년 사단법인 추자도어선주협의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1983년까지(31세) 스페인과 리비아에서 어획물 처리사. 10t 크기 목선 구입 문어잡이. 최근엔 참조기를 연중 잡았었는데 4월10일부터 8월10일까지 금어기로 해서 잡아선 안된다고 법적으로 규정시키는 노력을 했다. 최근 참다랑어 양식과 어구어법의 기술 개발 등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추자도수협이사, 동운호 주인.

 
 
수없이 바다와 싸워온 추자도사람 이정호. 그는 젊은 이방의 선원들과 더불어 산다. 전국 최대 참조기 생산지 추자도에는 240명 정도가 다문화 선원. 70척의 유자망어선엔 5명까지 외국인이 탈 수 있다. 조기잡이 그의 배에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몽골 방글라데시 등 먼바다에서 온 선원들이 있다. 젊은 그들에게서 그는 지난 날의 자신을 본다. 가족을 남겨두고 대서양으로 떠나던 그때, 그도 푸르렀던 20대였다. 삭풍을 견뎌야 하는 바다 위의 삶, 3D 업종으로 꺼리는 이 직업을 택한 이들을 그는 가족처럼 대한다. 총각들은 아름다운 쌍을 맺게 해줬다. 숙소도 만들어줬다.

 그는 그들에게 말한다. "여러분들은 국위선양을 하러왔다. 돈도 벌러 왔지만 보람 있는 일도 하라." 그런다. 그런 마음들이 통해설까. 그의 어선은 추자도 조기잡이 어선들 중 늘 상위권. "당국에서 추자도에 다문화가족 센터를 만들어줬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죠."

 그만큼 풍부한 노하우와 바다철학이 확고하다. 지금도 자정 넘겨서 자고 새벽 3시경 잠을 깬다. 국내 최대 참조기어장 추자바다를 깨운다. 자식들한테는 "항상 봉사하고, 남한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돼라, 탐하지 말라."고 한단다. "쉽게 번 돈은 반드시 헛돈으로 나가버려요." 왜냐? 돌아보면, 멀미증이 일만큼 그 역시 그런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 17세 소년 어부, 선장의 꿈 안고 통통배 타

 처음 통통배를 탄 것은 열일곱 살의 여름날. 소년어부는 새벽 3~4시쯤 바다 조업장소로 나갔다. 거기에 아침이 왔다. 5녀1남. 귀한 아들이었으나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고, 집안은 야금야금 가난이 밀려왔다. 중학교 졸업, 고교진학의 꿈은 좌절됐다. 통통배로 하추자교를 건너가던 시절, 진학한 친구들을 보면 눈물이 나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소년 이정호는 육지에 나가려고 몇 번 시도하다가 결국 배를 탔다.

 배에서 처음엔 선원들의 밥을 해줬다. "인연이 닿을라고 했는지 처음 배를 탔는데 멀미를 하지 않았어요. 배로 학교 통학을 하다보니 익숙해졌는지. 첫 배는 도미, 부시리, 멸치잡는 배였고, 여름엔 멸치, 가을에 삼치, 겨울에 도미 낚았지요."

 풍랑주의보 때도 나갔다. 제주시와 추자도 사이 큰화탈, 작은 화탈섬까지 갔다. 돌아오다보면 밤이 될 때가 있었다. 돈도 벌고 어른들 칭찬도 받았다. 목표는 1년만 해서 여비라도 마련해 목포로 진학하는 것. 허나 배를 타다보니 학구열은 식어갔고, 바다는 그를 매료시켰다. 이 길로 그냥 어부가 되자.

 "배를 타면서 상상을 해보니까 작은 배도 선장이 최고라, 어린나이에도. 이젠 조깃배, 삼치잡이 배로 갈아타면서 서서히 바다에 익숙해진거죠." 스물두살 그즈음, 두 살 아래 동네 벗과 꽤 이른 결혼. 3300㎡(1000평) 정도의 밭일을 아내가 거들었다.

 선장 면허시험을 보러 목포로 갔다. 거긴 큰 배들도 보였다. 선장시험 합격. 돌아오는데 마음이 요동쳤다. '큰 배로 진출하고 싶다'. 연년생으로 큰딸, 아들을 낳은 때였다. 선장의 꿈을 품고 첫 입사한 곳은 부산 고려원양. 다시 선원생활. "부산에 촌 사람이 와서 보니까 있을데가 있습니까? 밤에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 보면 전부 집마다 불을 밝히고 있어요. 아, 나도 서른살 이전에는 집 한 채라도 마련해야겠다 싶었어요."

 # 이란 기지선-스페인 라스팔마스로 진출

 원양어선에선 명태잡이 5만t짜리 공장선을 처음 탔으나 박스포장 일. 실망했다. 하선 후 중동지역 이란쪽에 기지선이 가는데 흔쾌히 승낙. 40도 되는 중동 열사의 바다. 6개월후 귀국. 다시 이란 쪽으로 출항. 3개월 후 회사에서 귀국요청이 왔다. "돈벌러갔는데 자꾸 꼬여요. 재정난으로 자꾸 이러니 돈을 벌 수 있는 여건이 안돼요. 그때 봉급이 3만5000원 정도 됐을 겁니다." 기회가 온 것은 귀국 후 수리일을 할 때. 인력수출 한창이던 1976년. 3년 계약으로 대서양 스페인 라스팔마스 그랑카나리아군도에 있는 모로코 선적의 선원으로 나갔다. 그때만 해도 선원 한사람이 300불. "떠나면서 결심했죠. 5, 6년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돈을 벌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

 거기서도 이상하게 꼬였다. "사장이 한국 사람들이 오면 고기를 많이 잡는다고 해서 원래 탔던 자기네 사람들을 내리게 하고, 우리 한국사람들 인력을 끌어들인 거예요. 선원들이 부당해고 당하니까 선주를 고발하고 싸우면서 3개월. 두 달 동안은 봉급이 안 나온 것 아닙니까. 빈들빈들 놀았죠." 짧은 영어도 통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서반아어 사전을 보내 달라 부탁하고 독학을 했다.

 3개월 후 다시 조업. 허나 배가 모로코 모리타니아 경계선(EEZ)에 침범하고 말았다. 한달동안 억류. 17명 한국인이 다시 라스팔마스로 귀항하자 5개월정도 봉급은 없었다.

 그가 언어가 좀 통한다고 테이블에 앉았다. 결국 한국 영사관에선 그들을 수출했던 곳을 통해 귀국을 종용했다. "꿈이 허물어지는거라. 나는 귀국을 안 하겠다. 다른데 있으면 보내 달라. 52명인데 거기서 7명 정도는 다른 회사로 이관되고 다시 나는 베네수엘라 배를 타게 된 거지요. 문어 오징어 도미 잡는 밴데 거기서도 두달 정도 있으니까 한국선장하고 회사측하고 트러블이 있어요." 한국에선 귀국을 종용했다. 기가 막혔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7명과 함께 귀국선을 타지 않았다. 라스팔마스를 떠나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일본회사에서 어획물처리사로 일하는 등 7년여를 보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세네갈까지 거치는 동안 에피소드도 많다.

 # 추자 뱃길서 배 뒤집혀 기적적으로 살아나

 7년 후, 서른넷. 그가 귀국하는 날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회한이 밀려왔으나 이 섬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을 잡았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로 조그만 배 하나 짓고 출항. 맨처음 조업은 문어잡이. 1년 지나 유자망으로 옮겼다. 삼치 고등어 조기잡이. 시작은 좋았으나 다시 그의 운명을 파도가 덮쳤다.

 1986년 어느 날, 제주시에서 고기 팔고 추자도로 오던 길. 관탈섬 근처였다. 부인과 선원 등 6명이 탄 배가 풍랑에 전복된 것. 허나 기적이 일어났다. "죽어야되는데 뒤따라오던 고향배가 구조한 거지요. 배가 침몰되는 순간, 어떻든 나보다 선원들이 먼저 올라가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아내까지 구조선에 올렸다. 맨 마지막 그가 배에 오를 때였다. 큰 파도가 덮쳤다. "내가 쑤욱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더라구요. 파도가 3∼4m 뛰면서 내가 이탈해있는데 구조함 배에서 던진 줄이 정통으로 내 몸에 맞아 잡고 올라간거죠. 물속에 들어갔다가 한번 떠오른 순간이었죠."

 배를 잃고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많이 어려웠다. 다시 작은 배로 문어잡이. 4년 정도했을까 다시 큰 배로 전환했다. 크고 작은 고통 앞에서 한번도 꿈을 잃지 않았다는 이정호. 4년 전 조기조업 도중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는 시련이 왔었다. 일어섰다. 바다는 살아가야 할 이유를 그에게 줬다.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야한다는 마음 뿐이었어요. 아, 하느님께서는 내가 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주셨구나. 나는 이제 덤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좀 더 사회에 봉사하고 선도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마음 뿐입니다."

 # 어족자원 관리 잘해 자손대대로 물려줘야

 지난 2, 3년은 어민들이 매우 어려웠다. 삼치 참다랑어 각종 해초류 등이 소득증대가 돼야하는데 감척해버렸기 때문이란다. "올해는 전환점이 되는 거죠. 참치도 지역에서 나게 됐구요. 참다랑어 어획 양식기술이 중요해요. 잘 보존하고 가꿔나가면 바다는 가장 희망있는 미래전략산업이죠. 어린고기를 살려주고 상품만 잡도록 그물도 크게 하자한다. 왜냐? 무엇보다 생명의 바다를 자손대대로 상속받게 하기 위해서다.

 "젊은 사람들이 자꾸 바다와 멀어지고 있습니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지역이 갖고 있는 자원을 살려야하는데 어떻게 젊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와서 내 고향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가, 소득을 올릴 수 있는가. 육지에서는 일할 자리가 없잖아요. 우리 어민이 40, 50대니까 앞으로 우리 수산업은 10년, 20년을 내다봐야합니다."

 또 하나 제일 문제가 되는 중국과의 EEZ문제를 다시 잘 연구해 양 정부 당국이 협조 협력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정호. "젊었을 때는 멀리 떠나는 꿈도 꿨지만 지금은 내가 살던 고향, 내가 태어난 고향, 부모가 잠든 고향 추자도죠. 바다와 어민이 함께 웃는 세상이 됐으면 합니다." 점점이 부표처럼 떠있는 섬과 섬들, 우리나라 최대 42개 섬을 거느린 추자도. 추자어민이 대한민국 최고의 소득증대를 하는 어민이 될 수 있도록 하고싶다는 야심만만한 이 바다인생 이정호. 그가 환하게 웃으며 바다로 향한다. 중년의 바다로. 저 바다에 생의 그물을 칠 시간이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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